대학교 4학년이던 2004년,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1위는 안철수 아니면 문국현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회사 순위에도
두 사람의 회사, 즉 안랩과 유한킴벌리는 꼭 들어가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두 회사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많이 주는 회사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회사도 아니었지만
저 두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에 가면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와는 확연히 다른,
올바르고, 정직하고, 투명한 경영을 목도하고
나도 덩달아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회사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재벌이니 세습 같은 구태의연한 리더십이 아닌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리더십을 보고 배우며
나 또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가을, 원서를 낼 때가 왔다.
안랩은 컴퓨터공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지원할 길이 없었지만
유한킴벌리 공채 소식에는 전공상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포지션이
딱 하나 있었다.
'품질관리(대전 근무)'
지방으로 간 이야기는 지난 글에 썼으므로 차치하더라도
품질관리라니. 회사 경험이 없던 나도 품질업무가 잘 해도 티 안나고
잘 못하면 사방에서 욕 들어먹는 업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품질관리로 회사생활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이 있었던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위에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직종, 직무에 다 발을 뻗치고 있는 '산업공학'이 내 전공이었지만
주위 선배 중 '품질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난 전공수업 중 '품질관리'를 굉장히 재미없게 들었다.
당시 난 다른 대기업의 '연구기획', '전략기획' 직종에 합격을 한 상태였기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회사를 보고 갈 것인가, 아니면 직무를 보고 갈 것인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단언할 수 있다.
직무를 보고 갔어야 했다.
당시 회사를 보고 간 유한킴벌리는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좋은 회사였다.
회사는 젊고 열정이 넘쳤으며, 문국현 사장의 리더십 하에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기업문화도 일반 대기업과 달랐다. 사장은 노조나 일반 직원들에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온갖 정보를 다 오픈하고 있었고, 매출의 1%를 사회에 기부하고 미친듯이 나무를 심어대는 것도 너무 좋았다.
지방은 출근시간이 7시-4시였는데, 동절기에는 3시 30분까지라 개인시간도 남아돌았다.
사장님 개인도 카리스마가 넘쳐흘렀고 직원들도 그를 너무도 존경해
언젠가 사업장에 방문하신다고 하니 이미 낸 휴가까지 취소하고 사장님 보러 대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국현 사장은 유한킴벌리에 있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었다.
내가 입사한 지 2년 반도 안 되어 그는
유한킴벌리가 아닌, 한국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정계로 뛰어들었고
강력한 리더를 잃은 유한킴벌리는 그 때부터 멋진 모습들을 하나씩 잃어갔다.
그리고,
회사가 아닌 직무를 선택한 나는
'품질관리' 업무를 4년 반 만에 나와 다른 업무로 옮기게 되었지만
시작이 시작인지라 단박에 완전히 다른 업무로 가진 못하고
인접업무로의 이동을 되풀이 하다 '전략'이니 '마케팅'이니 하는,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좀 더 이직에 유리한 직무로 오는 데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한 회사에서 20년 넘게 다니고 있는 것은
물론 유한킴벌리라는 회사가 너무 좋은 회사이기 때문도 하지만,
내 첫 직무가 '품질관리'였음이 크다.
좀 더 전망있고, 좀 더 여러 회사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직무로 시작했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오래 다니고 있진 않았을 것 같다.
회사보다는 직무다.
괜찮은 직무로 시작하면
회사가 변해도 나가기 쉽고
회사가 망해도 버틸 수 있는 거다.
좋은 회사를 선택해 좋은 조직문화를 경험한 건 분명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당위성에
내가 좋아하지도, 유망하지도 않는 직무를 골랐고
그 대가는, 꽤 길고 험한 커리어의 언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