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회사를 경험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 일반적인 한국 회사들은 인재가 들어왔다 하면,
이들을 말 그대로 '키우기 위해' 직무 순환 등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시키곤 한다.
마케팅으로 입사했어도 재무에 보냈다가, 영업에 보냈다가
인사업무도 시키면서 회사의 중요한 파트를 두루 섭렵하게 한 다음
그 모든 관문을 잘 통과한 직원들에게만 임원의 명예를 수여,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게끔 하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합리적인 프로세스다. 재무로 입사해서 20년 동안 한 길만 판 경우보다
회사의 구석구석을 다 경험해본 사람이 경영진으로서 더 올바른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즘처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는 사람들 개개인은 매우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물류와 구매를 거쳐 영업과 재무를 경험한 마케팅 전공자가
개인의 실수나 문제 때문에, 혹은 치열한 경쟁 때문에,
혹은 회사가 어려워져서, 혹은 끌어주던 상사가 회사를 관둬버려
'임원'으로 완성되는 이상적인 커리어의 경로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굉장히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치 등산 도중에 일정을 접어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더 올라갈 수도 없고 (승진)
그렇다고 어중간한 경력이라 옆 산으로 옮겨갈 수도 없다 (이직)
다시 내려와서 실무를 하기엔 체면이 안 서기도 하고,
이래저래 왔다갔다 하느라 실무를 잘 알지도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애만 태우다가 결국
관두고 창업이니 자영업이니 하는 데 손을 대 보지만
그걸 잘 한다는 보장도 없다.
회사는 조직 변경 시즌으로 바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대로 있게 되었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재'로 뽑혀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축하 못지 않게 걱정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회사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회사의 합리적인 결정이 꼭 개인의 합리적인 결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힘없는 직원들이 뭘 어떻게 하겠는가. 거절하면 밉보일 수도 있으니
알면서 '합리적이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길을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다.
회사 생활이란 게 다 그런거다.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