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마이 페어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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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KBS에서 오드리 햅번 특집으로 그녀가 등장하는 영화를 며칠 동안 이어서 죽 보여줬었는데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매번 챙겨봤던 기억이 난다.
회고하자면 꽤나 우습지만,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린 탓이었다.
뭐, 반해버렸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그 시절의 문성이란 워낙 쉽게 반하던 녀석이라
이 사람에게도 반했고
(한국 최초의 게임자키 길수현. 그 재미없는 프로그램을 만날 봤다)
이 사람에게도 반하고
(의천도룡기 86에 조민역으로 등장한 여미한. 지금은 사십 대 중반이시다)
심지어 이런 분에게도 반했을 정도니
(기업은행 여자농구팀 양희연, 지금이야 아줌마나 1995년 코트 위에서의 그녀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즈음의 내게 있어 오드리 햅번에게 반하는 것 정도야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당시 말로만 듣던 '로마의 휴일', '샤브리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등
그녀의 주요 영화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이 '마이 페어 레이디' 하나만 놓쳤었는데,
못 봐서 아쉽긴 했으되 굳이 비디오나 재상영관을 찾고 싶지는 않아서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냥 잊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런 과거(?)가 있어서일까.
오래 전 TV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오드리에 빠져들던 그 때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면서,
이번에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의 나의 심정은 마치,
십 년 전 축구 국가대표를 은퇴하고 동네에서 치킨집을 하다가
막내 아들의 운동회 때 '아이와 함께 공차기' 코너에 참여하여 축구공을 마주하게 된, 한 중년 아저씨의 마음 같았다.
자아. 오래간만입니다. 오드리 누나!
그런데, 어머. 이거 어찌된 노릇인지요.
시작한지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오누나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것이었다.
우 왕 이 거 내 가 잘 못 생 각 했 었 나?
머리가 좌삼삼 우삼삼 갸우뚱거렸다.
분명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게 맞을 터인데
지금 30분째 화면에서 억센 소리로 고함고함을 지르는,
이 영화의 주인공임에 분명한 저 여자는 목소리로 보나 얼굴로 보나
다른 여자임에 분명했다.
내가 영화 제목을 잘못 알고 있었나?
마이 페어 레이디가 아니라 페어 마이 레이디인가?
그럼 이 영화는 뭐지?
리메이크 영화인가? 아니면 오드리가 나오는 그 작품이 리메이크?
복잡한 생각을 하며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누구도 자기를 오드리라 부르거나
다른 사람을 오드리라 부르지 않았으며 (영화니까 당연한 노릇이지만)
이 꽥꽥거리는 도날드 덕 타입의 아가씨 외에
다른 젊은 여자는 아예 캐스팅이 되지도 않은 듯 했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영화시청을 긴급정지한 후
인터넷을 찾아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맞단다.
저 포스터에 나오는 여자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박경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얼굴은 시커멓고, 눈은 회색 빛 만연찬란하며
삐쩍 마른 몸을 갸우뚱갸우뚱 거리며 한겨울 아침, 차에 낀 성에처럼 독기를 서려내는
이 여자가
오드리 햅번이 맞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매치가 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이미 아름다움이 꺾여 버린 시절에 찍은 영화인가?
아니면 성형수술 전, 혹은 과도한 성형수술의 부작용이 나타날 무렵의 작품?
하지만 이런 의혹과 혼란도 오래지 않아 끝,
신데렐라는 중반쯤 되어 갑작스럽게 자기 본색을 드러내 버린다.
이렇게.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도.
아아. 빽 투 더 퓨쳐.
오래간만에 만나는 그녀의 황홀한 자태와 우아한 말투, 세련된 몸짓과 부드러운 눈길에
난 마치 십 수년 전, 수능이고 뭐고 그녀를 보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보고 반하는 영화 속의 남자들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변태에 가까운 변신을 마친 후 무도회장에 출첵한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줄줄이 엮어 듣더니
급기야 자기에게 한 눈에 반해 엄마(=여왕)한테 쪼르륵 뛰어가 나 쟤랑 춤추게 해줘, 앙탈부린
허우대 멀쩡한 왕자님과 고품격 사교댄스까지 춰 버리는데,
이런 동화적 설정마저도 왠걸, 공감이 가는 거였다.
이런 류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처음 접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런 장르야 말로 수많은 영화와 만화, 한국 트렌디 드라마가 우려먹은 가장 진부한 스토리라인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영화는 완전히 달랐다. 아니, 내용은 동일한데, 구조는 판박이에 다름 아닌데,
내게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는 소리다.
신데렐라가 되기 전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저건 오드리 햅번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었고
신데렐라가 된 후의 그녀를 보면서 나라도 반했겠다라 느낄 정도였으니
꼬꼬마 시절 오리지널 신데렐라 동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은 셈이었다.
오드리 햅번이라는 배우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냥 '매우 아름답다'라고만 여겨졌던 그녀가
다양한 모습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연기력 또한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10년 전처럼,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그녀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멋져. 나는 오늘 당신에게 또 한 번, 깨끗하게 져버렸습니다.
<별점: ★★★★☆☆>
Message to Life:
내가 그녀가 겉모습만이 아닌, 연기력이라는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화려한 드레스와 함께 스크린에 가장 아름답게 투사될 때가 아니라
허름한 옷차림과 걸걸한 말투,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할 때였다.
노후에 영화배우의 삶을 그만두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던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이 감동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배우였지만
'속'의 아름다움은 '겉'의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을 '겉'만 보기 일쑤고 나 역시 그러하지만, 겉은 언젠가는 시든다.
그 때 보여줄 만한 '속'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미리미리 준비해야할 것이다.
(2009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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