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티즌에서 활약할 때의 고종수)
1.
고종수. 축구팬들에게 있어 ‘비운의 천재’로 불리어지는 이름이다.
90년대 후반, 당시 한국 선수들 사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멋드러지게 휘어지는 왼발 프리킥과 정확한 중장거리 패스실력을 통해
수원삼성과 국가대표팀의 기둥으로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그다지 좋지 못했던 자기 관리와 계속 이어지는 부상,
톡톡 튀는 성격으로 인한 불화 등으로 인해 결국 대성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그라들고만 아까운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2002년 월드컵 팀에 끝내 포함되지 못한 뒤
기나긴 방황의 시기를 거쳐 삼십 대 초반에 다시 프로축구 무대에 돌아오긴 하였으나
이미 그의 몸상태는 예전과는 달랐고 이후 반복되는 부상과 불화문제로 인해
더는 도드라지는 활약을 하지 못한 채 그라운드에서 영영 떠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 한 살이었다.
안정환, 이동국과 더불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짊어질 기대주로 불리었으나
월드컵에서 세 골을 넣은 안정환처럼 축구선수로서의 절정의 시기를 겪어보지도 못해고
K리그 득점 신기록을 여전히 갱신하고 있는 이동국처럼 오래 그라운드에 서 있지도 못했다.
(월드컵 때의 안정환. 천재 고종수는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본인의 천재성만 믿고 교만했다고도 하고,
리니지 같은 게임에 빠지는 등 자기관리에 소홀했다라고도 하며,
한국 축구계가 그를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 등
다양한 평가를 쏟아냈었는데, 이러한 다양한 평들을 진주목걸이처럼 꿰어내는
일관된 수식어는 ‘비운悲運’이었다. 비운의 천재, 비운의 축구신동, 고종수.
2.
고종수의 경우를 좀 더 살펴보자. 그의 ‘비운’은 아래와 같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그 재능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했다
- 그러다 그 재능을 사용할 기간을 넘겨 버렸다
이에 비해 박지성이나 안정환, 홍명보 같이 대성한 축구선수들은 고종수와 엇비슷한,
혹은 그보다 못한 재능을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기’에
‘그 재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지 않았다.
이와는 전혀 다른 경우지만, 축구선수로서의 재능을 전혀 타고나지 않아서
국가대표는 커녕 청소년대표 한 번 못해보다가 결국 평범한 선수로서
축구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혹은 일찌감치 꿈을 접고 다른 일을 시작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축구에 쏟아부은 시간을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었을 다른 것에
현명하게 투자하지 못했던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랄까.
3.
하지만 이런 정리가 꼭 스포츠 선수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재능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면, 그리고 그 재능이란 것이
아래 정의(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남들과의 비교에 기반한
상대적 우월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모두는 재능이라는 것을 타고났으며 고로 우리 중에서도
‘비운의 천재’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나름의 논리를 획득하게 된다.
재능[才能]
[명사]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모짜르트 식의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성은 아닐지라도
우린 누구나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하는, 더 나은 분야를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이들은 수학을 잘 하고, 어떤 이들은 말을 잘 하며, 어떤 이들은 얼굴이 잘 생겼고,
어떤 이들은 근력이 좋다. 어떤 이들은 그림을 잘 그리고, 어떤 이들은 손놀림이 좋으며,
어떤 이들은 눈썰미가 좋고, 어떤 이들은 참을성이 좋다.
재능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만 발견하지 못하거나, 적절히 개발하지 못할 뿐이다.
자아. 그럼 여기서 어려운 질문이 하나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뭔지를 잘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재능을 적절한 시기에 충분히 사용하였는가?
답이 부정적이라면 당신도 고종수와 다를 바 없는
‘비운의 천재’이다.
4.
(김연아. 지금의 그녀를 비운의 천재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김연아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가 나처럼 균형감각이 전혀 없는데다가
머리만 크고 다리는 짧은 체형으로 태어났다면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한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로 그녀는,
-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O)
그리고 그녀는 그 재능을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적절히 잘 사용했다.
그녀의 체형이나 운동감각을 생각했을 때 피겨스케이팅을 택한 결정은 너무도 현명했다.
물론 그녀는 리듬체조를 해도 잘 했을 것이고, 육상을 해도 왠지 잘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테니스 같은 운동을 고집하였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난 도무지 윌리암스 아줌마를 누르는 김연아를 상상할 수 없다.
(전 테니스 챔피언 비너스 윌리암스. 김연아가 운동신경이 아무리 좋다한들
이 아줌마의 완력를 이길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김연아에게 아래 ‘비운의 요건’은 해당하지 않는다.
-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그 재능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했다 (X)
피겨 스케이팅은 여타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나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나이 마흔이 넘어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선수를 본 적이 있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있다 해도 그들의 근력은, 그들의 균형감각과 신체적 아름다움은
김연아와 같은 한창 때의 소녀들을 이겨내지 못한다.
김연아가 서른 네 살에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단언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로 그녀는 아래 요건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 그러다 그 재능을 사용할 기간을 넘겨 버렸다 (X)
이렇듯 그녀의 선수로서의 인생은 ‘비운’의 굴레에 씌이지 않았으며
타고난 재능 위에 부단한 노력의 힘을 더함으로써 금메달 리스트가 되었고
한국에서 가장 빛나는 운동 선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5.
다시 우리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의 성적일변도의 교육시스템을 생각해봤을 때 예체능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십대 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혹은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에 초점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내 경우 중고등학교 때 가장 잘 하는 과목이 문학과 한문이었다.
중간 이상을 면하기 어려웠던 수학/과학에 비해 이들 과목의 성적은 항상 상위권에 있었고,
매일같이 일기도 쓰고 가끔 시도 썼던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으로서 이런 과목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난 ‘이과생’이었으니까 말이다. 즉 나는 아래의 요건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그 재능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했다 (O)
(고등학교 1학년 때 지은 시 ‘목요일에’)
이십 대 후반부터 자기 계발에 열을 올린 덕분인지 지금와서 내 재능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반적으로 뭣하나 잘하는 것이 없는 인생이긴 하나,
그래도 난 글을 쓰는 것과 다수의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잘 하는 편이다.
직업적으로 따져본다면 ‘학원 강사’나 ‘프리랜서 작가’ 정도가 내게 어울리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와서 이런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 젊은 나이인 것은 사실이나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를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이다.
결국 나는,
- 그러다 그 재능을 사용할 기간을 넘겨 버렸다 (O)
이러한 논리로 봤을 때 나는 고종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대단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것은 물론이나, 내가 가진 작은 재능들 마저도
잘 써먹지 못하였으므로 비운의 천재의 정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이지일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인가?
어렸을 때의 선택 때문에, 남들의 강요 때문에, 결혼과 육아 때문에, 당신의 게으름과
나태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말미암아 당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 역시 비운의 천재이다.
6.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운의 천재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짊어지고 사는 가장들이나
육아로 인해 본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누구누구의 집사람’, ‘누구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여성들. 서른이 넘도록 자기가 뭘 잘 하는지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를
발견하지도 못한 사람들. 모두가 비운의 천재들이다.
허나 아직 인생은 길다.비록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쳤을지라도
우리에겐 나이 먹어도 쓸 수 있는 재능도 있고, 다른 기회를 접할 시간도 있다.
실제로 인생 후반부에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예를 자주 접할 수 있지 않은가.
고종수도 이제 겨우 서른 다섯에 불과하다. 비운의 천재인 그도 모든 것을
뒤집어놓을 시간이 충분하고, 또다른 비운의 천재인 나나 당신,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비운'을 '행운'으로 바꿀 수 있는 기한은 임종의 순간까지 연장되어있기에.
(고종수도 아직 늦지 않았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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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jo
2012.07.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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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
2012.07.19 00:20
응 좋은 얘길세. 난 여전히 받은 것을 최대한 잘 쓰는 것이 행복한 삶의 하나의 경로라 믿네. 셀레브리티가 되지 못해서 '비운'이라고 적은 것은 물론 아니고, 내가 가지고 태어난,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재능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고 억지로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면서, 혹은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떠밀리듯 사는 삶이 안타깝다고 한 거지. 결국 자네 얘기랑 얼추 비스무레한 것이지도 모르겠지만.
'행복의 조건'을 읽고 깨달은 것은, 행복의 조건이 진짜 많고 다양하다는 것. 재능에 포커스하는 것은 책에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하나의 분명한 길이리라 믿네. -
미영
2012.07.25 10:13
지난번에도 긴 댓글을 쓰다가 지워버렸지만 뭔가 할 말은 많은데 딱 집어 쓰기가 어렵군.
복직을 한 달 앞둔 요즘 나도 '내 재능'과 '내 적성'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다. 이놈의 고민은 어째 스무살부터 고대로인지!! -
문★성
2012.07.26 13:50
그래도 지우진 말지 그랬냐. 같이 생각해보면 좋잖은가. 그러고보니 몇 년 전에 명양이 "내 장점이 뭐냐"라고 내게 물었던 것도 기억난다. 우리 평생 안고 가야될 고민인가보다 ㅜ 엉엉
비록 세상이 젊은 나이에 기인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야 하는
몇몇의 영역에서 셀레브리티란 명칭으로 재능+ 시의적절함(운)
+ 노력 = 조기의 (경제적) 성공의 공식을 미화하고 있긴하나...
말그대로 기인들의 세상이고.. 한줌이 안되는 인간들과 그걸 추종하는 다수 언론의 세계인게지..
(돈되는) 기인이 되고 싶은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행복의 조건'에서 보다시피, 인생은 충분히 길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갈수 있는 것이지 않겠냐?
다만 남보다 좀더 열린 따듯한 마음과, 자기자신에 대한 엄격함 + 인내, 끊임없는 삶에 대한 의지만 있다면 ,
언론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기인, 경제적 성공으로 모든것이 미화되는 기형적인 삶이 아닐지라도 개개의 주어진 삶을 훌륭히 살아낼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