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간다.
개중에는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외모와 같은 것들도 있고,
눈으로 보이진 않는 내적인 속성들도 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네 번째 주제는 후자에 속한다. 눈에 보이진 않는다.
만질 수도 없다. 일상 생활 중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나이에 비례하여 우리 속에서 사라지는 소중한 무언가 중 하나이다.
바로 ‘용기’다.
신념에 따라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남의 시선과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매력 말이다.
술 취해 행패부리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을
용기라 부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무례하게 행하는 것 또한 용기와는 거리가 멀다. 남을 속이고 상해를 입히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용기는 진정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자신의 말대로, 믿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것을 당당히 지적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길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이들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 안의 용기는 희석되어 간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리를 보고도 눈을 감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비난과 책임이 두려워
끝끝내 침묵한다. 매력을 느끼는 이성에게 말 한 마디 쉽게 걸지 못하고
잘못된 길이라 확신함에도 몸을 떼어내지 못한다. 잃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력, 재물, 사회적 평판, 체면,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까 두려워서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젊을 때는 쌓아온 것 자체가 없고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혹은 아예 무지하기 때문에
쉽사리 도전할 수 있다. 용감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외모, 관계, 가능성 등
많은 것을 이미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것들을 잃어서이기 때문인지
그나마 젊을 때보다 더 가지게 된 물질과 사회적 평가에 더욱 의존하게 되어
종래는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길을 택하고 마는 것이다.
나이 든 정치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심지어 명명백백한 증거가 나왔다 할지라도 모함이라고,
정치공세라고 항변하곤 한다. (실제 모함인 경우도 다분하지만)
자리를 지키고자 안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혹은 정치 신념을 휴지처럼 버리고
다른 당으로 옮겨 타는 철새 같은 모습에서 어찌 용기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가족이나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중년, 혹은 노년의 남자와 여자를 보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 주저 없이 편하게 쓸 수 있는 말인데
나이가 든 사람들의 입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이겨내던
청년 시절의 용기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혼적령기의 청년들이
소개팅이나 선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애초에 ‘이성적 만남’을 전제로 한 자리다 보니 구태여 ‘사랑을 고백할 용기’ 따위
손 위에 꺼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단체 미팅처럼 경쟁할 필요도 없으니
참으로 편한 시스템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 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십대 후반, 이십 대 초반 정도까지일 뿐, 그 나이대가 넘어가면 용기 있는 자들은
대부분 자연 소멸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자’ 혹은 ‘자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하게 된다.
어릴 때는 달랐다. 아니, 한 십 년 전쯤만 해도 친구들 중에 지나가는 여자에게 말 걸어
사귀기 시작한 경우도 제법 있었다. 딱지 맞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개중에는
정말 그걸로 잘 풀린 녀석도 있었다. 난 아직도 버스 옆 자리에 앉은 여자를
끝까지 따라가 끝내 사귀는데 성공한 동향친구 최모군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 이는 또 하나의 ‘미친 짓’이 된다.
우리는 나이를 한 살씩 덧붙임과 동시에 용기를 버려 가면서
그걸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소싯적 어린 애들 사회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는
‘싸움 잘 하는 녀석들’에게 힘이 부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당당히 맞서는 애들이 있었다. 몸집은 조그마해도 눈을 부라리고 턱을 치켜들어
덩치 큰 녀석들에게 할 말 다하다가 종종 얻어맞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이런 애들은 남자애들은 물론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모임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조직의 어떤 잘못된 것들을 보고
그에 맞서는 사람들은 어떻게 불리는가. 내부고발자라, 배신자라 칭해지고
머리가 돈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용기를 가지기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겠지.
꿈을 찾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잘 닦아온 경력, 번드르르한 학력과 재산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불리는가? 이 사회는 그들은 ‘정신이 나갔다’라 일컫는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용기를 잃어가는 것은 이런 구조에서는 외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주로 주름살과 쳐진 피부, 탄력 없어진 몸매에서 노화를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 얼굴이 제 나이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동안이고
십 대 이십 대 때의 피부와 몸매를 유지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
용기가 담겨져 있지 않으면 몇 마디 채 나눠보지 않아도 제삿날 향 냄새보다 더 강하게
우러나는 ‘노화의 냄새’를 맡게 된다. 노인네의 향취라고나 할까.
하지만 고맙게도 이는 제거될 수 있다. 주름살 제거나 지방 제거보다 더 쉬울 수도 있다.
젊게 보이는 요령은 여러 얘기들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돈을 투자하면 된다.
좋은 화장품을 쓰고, 피부 관리를 받으며 (필요하면 수술도 포함해서)
유행 타는 멋진 옷을 입고 다니면서 헬스클럽에서 개인 트레이닝 지도를 통해
몸매를 다듬으면서 유기농으로 재배된 좋은 음식만 골라먹다 보면
웬만큼은 어려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젊게 사는 것은 젊게 보이는 것과 다르다.
단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젊게 살고 싶다면,
그래서 노화의 냄새를 풍기지 않고 싶다면 용기를 갖춰야 한다.
용기 있게 말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면 그게 젊게 사는 길이다.
식도 위로 잘 올라오지 않는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책임진다는 말,
새로운 것을 한 번 시도해보겠다는 말, 꿈과 비전에 대한 말을 우물가에 물 긷듯이
올려내 입과 혀로 토해내고 이 말 그대로 행동하며 산다면 그 말과 행동 만큼
젊음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위의 적힌 말들을 하는 백발의 신사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멋져 보이겠는가! 얼마나 젊어 보이겠는가!
홈페이지에 이리 장문의 글을 갈겨대고 있는 것 또한 내게는 용기의 행위다.
보시다시피 수준도 높지 않고, 몇 명 보지도 않을 것이며, 나한테 돈 한 푼 안 가져다 줄
글을 쓰느라 몇 시간씩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은 8년 전 이 홈페이지를 처음 열 때에 비해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걸음만큼이라도 생각을 더 하고
이를 글로 토해내며, 내가 말하고 적은 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만큼의 젊음이
내게 원고료로 입금되리라 믿는다. 비록 제법 연체는 될 지라도 말이다.
혹시 모르잖은가. 내 나이 육십에도 이렇게 홈페이지에 글을 써대고 있으면
그걸로 사람들이 한 열 살의 노화쯤은 깎아줄지도.
우리가 나이들면서 잃어가는 것들은 다음 편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개중에는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외모와 같은 것들도 있고,
눈으로 보이진 않는 내적인 속성들도 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네 번째 주제는 후자에 속한다. 눈에 보이진 않는다.
만질 수도 없다. 일상 생활 중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나이에 비례하여 우리 속에서 사라지는 소중한 무언가 중 하나이다.
바로 ‘용기’다.
신념에 따라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남의 시선과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매력 말이다.
술 취해 행패부리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을
용기라 부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무례하게 행하는 것 또한 용기와는 거리가 멀다. 남을 속이고 상해를 입히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용기는 진정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자신의 말대로, 믿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것을 당당히 지적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길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이들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 안의 용기는 희석되어 간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리를 보고도 눈을 감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비난과 책임이 두려워
끝끝내 침묵한다. 매력을 느끼는 이성에게 말 한 마디 쉽게 걸지 못하고
잘못된 길이라 확신함에도 몸을 떼어내지 못한다. 잃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력, 재물, 사회적 평판, 체면,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까 두려워서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젊을 때는 쌓아온 것 자체가 없고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혹은 아예 무지하기 때문에
쉽사리 도전할 수 있다. 용감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외모, 관계, 가능성 등
많은 것을 이미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것들을 잃어서이기 때문인지
그나마 젊을 때보다 더 가지게 된 물질과 사회적 평가에 더욱 의존하게 되어
종래는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길을 택하고 마는 것이다.
나이 든 정치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심지어 명명백백한 증거가 나왔다 할지라도 모함이라고,
정치공세라고 항변하곤 한다. (실제 모함인 경우도 다분하지만)
자리를 지키고자 안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혹은 정치 신념을 휴지처럼 버리고
다른 당으로 옮겨 타는 철새 같은 모습에서 어찌 용기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가족이나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중년, 혹은 노년의 남자와 여자를 보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 주저 없이 편하게 쓸 수 있는 말인데
나이가 든 사람들의 입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이겨내던
청년 시절의 용기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혼적령기의 청년들이
소개팅이나 선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애초에 ‘이성적 만남’을 전제로 한 자리다 보니 구태여 ‘사랑을 고백할 용기’ 따위
손 위에 꺼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단체 미팅처럼 경쟁할 필요도 없으니
참으로 편한 시스템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 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십대 후반, 이십 대 초반 정도까지일 뿐, 그 나이대가 넘어가면 용기 있는 자들은
대부분 자연 소멸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자’ 혹은 ‘자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하게 된다.
어릴 때는 달랐다. 아니, 한 십 년 전쯤만 해도 친구들 중에 지나가는 여자에게 말 걸어
사귀기 시작한 경우도 제법 있었다. 딱지 맞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개중에는
정말 그걸로 잘 풀린 녀석도 있었다. 난 아직도 버스 옆 자리에 앉은 여자를
끝까지 따라가 끝내 사귀는데 성공한 동향친구 최모군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 이는 또 하나의 ‘미친 짓’이 된다.
우리는 나이를 한 살씩 덧붙임과 동시에 용기를 버려 가면서
그걸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소싯적 어린 애들 사회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는
‘싸움 잘 하는 녀석들’에게 힘이 부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당당히 맞서는 애들이 있었다. 몸집은 조그마해도 눈을 부라리고 턱을 치켜들어
덩치 큰 녀석들에게 할 말 다하다가 종종 얻어맞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이런 애들은 남자애들은 물론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모임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조직의 어떤 잘못된 것들을 보고
그에 맞서는 사람들은 어떻게 불리는가. 내부고발자라, 배신자라 칭해지고
머리가 돈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용기를 가지기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겠지.
꿈을 찾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잘 닦아온 경력, 번드르르한 학력과 재산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불리는가? 이 사회는 그들은 ‘정신이 나갔다’라 일컫는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용기를 잃어가는 것은 이런 구조에서는 외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주로 주름살과 쳐진 피부, 탄력 없어진 몸매에서 노화를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 얼굴이 제 나이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동안이고
십 대 이십 대 때의 피부와 몸매를 유지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
용기가 담겨져 있지 않으면 몇 마디 채 나눠보지 않아도 제삿날 향 냄새보다 더 강하게
우러나는 ‘노화의 냄새’를 맡게 된다. 노인네의 향취라고나 할까.
하지만 고맙게도 이는 제거될 수 있다. 주름살 제거나 지방 제거보다 더 쉬울 수도 있다.
젊게 보이는 요령은 여러 얘기들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돈을 투자하면 된다.
좋은 화장품을 쓰고, 피부 관리를 받으며 (필요하면 수술도 포함해서)
유행 타는 멋진 옷을 입고 다니면서 헬스클럽에서 개인 트레이닝 지도를 통해
몸매를 다듬으면서 유기농으로 재배된 좋은 음식만 골라먹다 보면
웬만큼은 어려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젊게 사는 것은 젊게 보이는 것과 다르다.
단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젊게 살고 싶다면,
그래서 노화의 냄새를 풍기지 않고 싶다면 용기를 갖춰야 한다.
용기 있게 말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면 그게 젊게 사는 길이다.
식도 위로 잘 올라오지 않는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책임진다는 말,
새로운 것을 한 번 시도해보겠다는 말, 꿈과 비전에 대한 말을 우물가에 물 긷듯이
올려내 입과 혀로 토해내고 이 말 그대로 행동하며 산다면 그 말과 행동 만큼
젊음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위의 적힌 말들을 하는 백발의 신사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멋져 보이겠는가! 얼마나 젊어 보이겠는가!
홈페이지에 이리 장문의 글을 갈겨대고 있는 것 또한 내게는 용기의 행위다.
보시다시피 수준도 높지 않고, 몇 명 보지도 않을 것이며, 나한테 돈 한 푼 안 가져다 줄
글을 쓰느라 몇 시간씩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은 8년 전 이 홈페이지를 처음 열 때에 비해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걸음만큼이라도 생각을 더 하고
이를 글로 토해내며, 내가 말하고 적은 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만큼의 젊음이
내게 원고료로 입금되리라 믿는다. 비록 제법 연체는 될 지라도 말이다.
혹시 모르잖은가. 내 나이 육십에도 이렇게 홈페이지에 글을 써대고 있으면
그걸로 사람들이 한 열 살의 노화쯤은 깎아줄지도.
우리가 나이들면서 잃어가는 것들은 다음 편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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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jo
2011.07.04 15:16
-
문★성
2011.07.04 20:09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다룰 때만 느낄 수 있는 재미인데, 정의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거지. 예컨대 내가 정의하는 '즐거움'과 만수르 맨시티 구단주가 정의하는 '즐거움'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거.
이 글에서 내가 말한 용기는 결국 '자기 마음의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충실할 수 있는가'라는, 다소 결과물 중심적으로 정의된다네. 치기 중 일부분도 포함될 것이고 자네가 든 예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말해 그다지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예전만큼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부정한다면 내부적으로는 아주 복잡한 사고의 작용이 있을지 몰라도 그 결과물은 '용기 없음'으로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네.
물론 쉽게 논할 내용은 아니지. 자기 집앞 폐기장 들어서는 것에 항의하여 일인시위도 불사하는 사람이 직장에서는 상사가 무서워 옳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건 용기 있는 사람일까. 조직에서 과감한 투자결정을 내림으로 큰 이득을 벌어다준 사람이 몇 년째 별거 중인 부인에게 미안하다, 다시 합치자 한 마디 할 용기가 없다면 그건 용기 있는 사람일까.
내가 계산한 바는 이렇다네. 일부 특출난 사람들은 제외하고 평균의 사람을 대상으로, 리더십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었거나, 경험의 축척으로 학습된 용기, 술과 같은 다른 시스템의 힘을 빌린, 화자에 따라 용기라 불릴 수도 있는 행위는 배제하고 (자네가 말한 의례적/가식적/실용적인 무언가도 여기에 들어가겠군) 평균치를 따져보면 - 그건 분명 그들이 젊었을 때보다 못하지 않는냐는 것. 어쨌거나 평범한 우리네 인간군상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할 말 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거 하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살고 있으니까 말일세. 나는 이를 '용기 없음'으로 뭉뚱그려 정의하네만, 자네는 진정성, 절실함, 순수함으로 표현할지도? 그렇다면 같은 내용이라 생각하네.
하여간 간만에 controvesial 해서 좋다. 좀 자주 찾아와서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게나. 히히.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것을 고려하는것도..
자기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을꺼라는 인지를 할수 있는것도..
요약하자면 뒤를 생각하는 것, 이게 '용기'를 줄이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의도적으로 소리를 높이는 '용기(?)'도 있긴 하지 않냐?
자기 밥그릇이 침해되는데 대한 과감한(?) 컴플레인도 있을테고,
조직의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소리를 높이는 용기도 있을테고 말이야..
그럼에도, 그것을 치기와 구별된 용기가 없어진다고 말할수 있나?
생각은 있으되, 행동하지 않는 게으름을 탓한다면 더 동의하겠지만,
더 절실함과 덜 절실함의 문제이거나 더 순수함과 덜 순수함의 문제는 아닌가?
오랜만에 Controversal 한 Issue로구나..
용기가 출발하는 Base, 중요시하는 가치가 달라짐으로 인한 변화가, 개인차를 두고 발현하는게 아닌가 싶구나.
결국 진정성과 절실함, 순수함을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로 귀결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그리고 타인의 삶에 대한 인간적(의례적/가식적/실용적이 아닌) 존중에서 시작되지 않겠냐?
결국 타인의 눈과 평가가 아니라, 나와 타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의 공감이 '용기' 라는 것을 정의할테니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