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략)
그리고 지금 난 내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가려 한다.
물론 내게 마련되어진 시대적, 공간적 상황이라는 것이
그 몰고 가는 행동을 묵과하진 않을테지만 그래도 주어진 상황에서나마
어딘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 정해진 룰 안에서 그 상황이란 것을 이겨내
초과달성을 이룰 수 있다면 더 바랄 일이 없을 것이고.
외출 나간 이들이 많아 한결 비워진 내무실에서
몇몇이서 약간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껏해야 SES가 어떻고 GOD가 어떻고 누가누구 연예인 몸매가 어떻고 하는 식의
수준 낮은 대화가 오가던 자리에서 어느 정도 심화화한 사랑의 관념에 관한 주제가 나오고,
여성이 어떠한 존재냐 같은 대화가 나온 것은 심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리 멀지 않아 그 주제가 강남역 부근의 나이트를 논하는 정도의 몰락을 보여주긴 했지만 말이다.
진지한 대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성격 탓에 그 대화 속에 주체적으로 반응하여
많은 얘기를 하고 또 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심중 깊은 곳에서 열렬이 작용하였으나
그냥 당차게 자리를 박차고 독서실로 와 버렸다.
사랑이 무언가라는 진지한 주제를 조용히 누그러뜨릴만한 중요한 주제가
나에겐 하나 더 있기 때문이고, 또 구태여 남들 얘기 들을 것 없이 내 안에선 이미
앞으로의 연애 생활과 결혼 생활에 관한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마스터 플랜이 설정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서두에 밝혔듯이 정말 난 불타 올라야 하고, 달려가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에 책 읽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땀흘려 뛰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임을
손바닥 바라보듯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난 내가 달려가야 할 순간을, 후회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직시해왔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 지난 생에 후회라는 오점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없는 사실인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 못 이룰 때도 아니고,
밀고 당기는 사랑 다툼에 혼란스러워 할 때도 아니며,
머리 속에 Trash를 삽입할 때도 아니다. 지금, 달려가자.
-------------------------------------------------------------------------------
많은 이들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십 대를 그리워하고,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댓가도 치를 수 있다라고 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난 싫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십 년 전의 독기어린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절실했고, 답답했고, 불안했고, 그래서 저 일기에서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스스로를 다잡아야했고 독려해야 했던 자신을,
그 때의 내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군에서 보냈던 2001년은 내가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 중 하나였다.
병장이라는 타이틀과 행정병으로서의 널럴함이 허락해준 덕분이겠지만,
하루 일과가 끝나 남들이 축구를 하고, 건빵을 먹으며 가요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순간에도
난 혼자 구석에 박혀 공부를 하고 있었고, 일직사관의 소등 명령이 떨어지면
따로 사관실을 찾아가 독서실 사용 허가를 받아가면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었다.
앞길에 대한 뚜렷한 비전도 없이, 전략도 없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영어, 상식, 통계 등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파고 들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제대 후를 기대했지만 난 제대 후가 겁났다.
남들은 대학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나열하며 키득거리곤 했지만
난 학교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뭔가라도 해야 했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이 공부였기에
간절히 붙잡았고 겨우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독서실의 불을 마지막으로 끄고,
밤 늦게 내무실로 돌아왔을 때 드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잠들어 있는 내무원들의 모습에서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으니 말이다.
비록 그때 공부하던 내용 중 대부분은 지금에 와서는 불필요한 지식이 되었지만,
이 시기가 십 년 전에 비해 분명히 발전했다 자부할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저 때 불이 붙은 삶에 대한 열심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일기에 적었듯 저 시기는 자칫하면 길게 지속될 후회의 시작선이 될 수도 있는 때였고,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다행히도 지금은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돌아갈 필요도 없다.
대신 지금의 내겐 그 때와 다른, 더 어렵진 않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은,
여전히도 벅찬 삶과의 사투가 있으니까 말이다.
또 한 번의 십 년의 세월 뒤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오늘도 내 앞에 놓인 이 싸움에 최선을 다하자.
이를 꽉 물고, 다시, 달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