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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이 들면서 잃어가는 것들. 그 두 번째는 ‘관계’다.

나이가 들면 주위에 사람이 사라져간다.
어릴 때 그 많던 친구들은 서서히 연락이 끊기기 시작하다가 상당 수는 어느 순간부터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저 옛날 밤 늦도록 어깨동무를 하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논하던 친구도, PC방에서 스타를 하며 같이 새 아침을 맞던 동생도, 인생은 멋지게 살아야
한다며 쉰 목소리로 격정을 토로하던 선배도,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애교가 듬뿍 묻어 있던
착한 여자 후배도 언제부턴가 연락하는 주기가 길어지더니 이제는 결혼을 했는지,
자식은 낳았는지를 넘어 일부는 살아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먼 관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여전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가족은 남아 있고, 앞으로 새로운 가정을 만들긴
하겠지만 나이가 들면 예전의 새파란 색의 풋풋한 우정도, 관리하기가 벅찰 만큼 신경 쓸 게
많았던 복잡한 교우관계도, 다채로운 사회 생활과 이로 인해 얻게 된 예상치 못했던
좋은 사귐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마누라, 자식을 비롯한 가족, 친척, 몇 안 되는 옛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테고 추가로 교회나 동호회에서의 관계도 있겠지만,
이 정도가 나이가 든 이가 가질 수 있는 인간관계의 평균이라 생각된다.

숫자 뿐만이 아니다. 관계의 깊이도 덩달아 사라진다. 남아 있는 옛 친구들과는
예전만큼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고 자주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직장 동료들에게서는 속 깊은 우정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나이 들면서 가장 크게 상실감이 느껴지는 것이 이 관계란 것이다.
외모야 지난 글에서 밝혔듯 스스로는 내가 늙어 보이는지를 잘 감지하지 못하니까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허약한 방어라도 할 수 있다지만 당장 주위에 사라진 사람들은,
지폐없는 지갑처럼 얄팍해진 관계들은 주식으로 잃은 돈보다 더 절실하게,
뼈아프게 다가온다. 전화번호부를 살펴보거나, 예전 홈페이지 글이나 일기를 읽어보거나,
앨범을 훑어보면 어느새 연락 못하고 지낸 지 몇 년이 넘은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동창들, 선후배들, 동문들, 인턴 동기들, 권투체육관 식구들,
대구 교회, 대전 군인 교회, 서울 교회 친구들, 학원동기들, 붉은 악마 등 각종 동호회,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당신들… 다 어디 갔는가?

내 인간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어딜 가도 사랑 받는 타입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남자애들보다 여자애들과 잘 놀긴 했으나
어디든 잘 끼어들고 어울리려 노력하는 타입이었고 원만하고도 넓은 인간관계를 그려갔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도둑이 들어 다 털고 간 빈 집을 바라보고 허탈해하는 것처럼
헐렁해진 관계의 빈곤함을 목도하고 있다.

물론 대구, 서울, 대전을 떠도는 방랑 생활과 오랜 해외출장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불어 내 스스로 예전만큼 관계에 투자를 못하고 있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장소에 못을 박고 살았다 한들, 고정적으로 일주일에
수 시간을 투자한다고 한들 이십 대 초 중반의 그 풍요롭고도 화려했던 인간관계들을
유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관계라는 것은 쌍방향의 작용을 기저로 한다. 한쪽만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관계의 문제를 나이 때문으로 떠넘기는 것은 나이가 들게 되면
순서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 관계를 유지할 능력, 그리고 의지를
상실하기 때문에 그렇다. 많은 시간을 들여 관계유지에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십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상대방 역시 십 년 전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 바둥거린다고 해결된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결혼한 녀석들은 마누라(혹은 남편)과 자식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점점 더 힘들어지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예전처럼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전과 같이 모임을 주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어졌으며 모처럼 모임을 잡는다 해도
처갓집에 일이 있다느니, 아이가 아프다느니, 마누라와 부부싸움을 했다느니,
삼 일째 야근이니 지방 출장이니 하는 수많은 종류의 이유들로 인해 빈 자리가
채워진 자리보다 많은 것이 부지기수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

대신에 우리는 회사 동료들을 만난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얼굴 보다가
일 끝난 후 밖에서 다시금 만나는 등 긴 시간을 함께 한다.
하지만 이 관계는 또 얼마나 진실하고 무게 있는 것일까. 
당장 내 업무가 바뀌니 그렇게 자주 연락하던 타 부서,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통화목록에서 싹 사라져버렸다. ‘결혼할 때 꼭 부르세요’ 라고 볼 때마다
내 손을 굳세게 잡고 말했던 그들. 과연 내가 곧 결혼한다면 몇 명이나 오겠는가.
이해관계가 사라진 지금에 말이다.

지금 남아시아에서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다.
어제도 다같이 교외로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들 중 몇 명이나 계속 연락을 취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아,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가끔 메신저나 메일로 인사 주고 받는 것이 전부일 테다.
그러다가 몇 개월 동안 같이 하는 업무가 없다면 또 깨끗하게 연락이 끊기겠지.
일로 만난 관계라는 것이 다 그런 거다.

그나마 일 외적으로 우정을 쌓은 동기들과 몇 명의 아주 친한 동료들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회사의 전략으로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된 상황.
이 역시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이라 치부한다면
너무 포괄적인 정의가 되려나. 비겁한 핑계 정도로 여겨지려나.

그러고 보면, 사람은 어차피 사회적 동물인지라 어차피 나이가 든다고 해도 관계 자체를
아예 맺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이로되 관계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적에 만나던 사람들은 내가 함께 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같이 놀고 싶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기꺼이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끔 만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꼬꼬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학교 때까지도 난 내가 놀고 싶은 놈들하고만 놀았다. 맞지 않는 애들이랑
어울릴 필요 자체를 못 느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이런 관계들이 일종의 의무로서의 성격으로 변모하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할 권리는 없어지고 등에 져야 할 의무는 커지는 관계 말이다.

내가 반드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마누라와 자식들,
내가 반드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처갓집 식구들,
내가 반드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직장 상사와 동료들……

선택의 자유와 그로 인한 편안함이 있던 자리에 의무가 자리 잡히면서
안 그래도 점점 더 힘들어지는 삶의 길에서 인간관계는 귀한 선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어려움으로 자리 잡혀가는 것 같다.
살아가면서 힘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힘이 드는 관계 말이다.  

어릴 적 그토록 내게 많은 힘을 주었던 관계라는 선물은
나이와 함께 손으로 움켜진 모래처럼 슬프게 빠져나가고 있다.

나이 드는 것이란 이렇게 슬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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