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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집, 자동차, 그리고 가방

문★성 2010.07.25 15:23 조회 수 : 196

한국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그것이 오래된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단국가와 군사독재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야기된 것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낸 산물인지는 몰라도
한국사회는 수직적이면서도 물질적이며,
그러면서도 지나치리만큼 단순한 계급사회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시작은 학교에서부터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며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이어지는
단계적 교육 자체의 문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외려 한국 교육의 계급성은
현재의 단계가 단지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인식되는데 있다.
즉, 초등학교는 중학교를, 중학교는 고등학교를,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는 조금 덜한 편이지만 중학교만 가도 좋은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는 압박이
수업 시간마다 줄을 잇기 시작하며, 고등학교 자체에 대한 얘기보다
대학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듣게 되는 고등학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 대학교는 어떨까. 모두가 공감하듯 요즘의 대학 역시
취업이라는 다음 과정을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 좋은 회사에 가기 위해 고학년일수록 학교 공부보다 토익 공부, 기업 인턴십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이 작금의 대학생 아니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공한 취업 역시 끝은 아니다. 말단 신입사원으로부터
임원과 같은 높은 위치로 이어지는 기나긴 계급라인이 또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린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다음 계급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하는
철저한 계급 사회 구조에 몸을 맡기기 시작한다.

(군대 얘기는 할 필요도 없겠지?)

뿐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또 새로운 계급 체계가 등장하여 우리 삶을 얽매이기 시작한다.
제 때 결혼하여 애 낳고, 내 집 마련 한 후
괜찮은 차와 누구나 알아봄직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에 이르기까지,
끈적끈적한 계급성이 사회 전반에 판을 치고 있다. 조금 더 얘기를 풀어나가보도록 하자.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아무래도 ‘결혼 빨리 해라’다.
나이가 찼으니 그러려니 이해한다. 좋아. 했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무슨 얘기를 들을까?
‘얼른 애기 낳아라’다. 안 봐도 뻔하다. 훤히 보인다.
하나 낳으면? ‘이제 둘째 가져야지’. 쉽사리 예상 가능하다.
그게 한국 사회에서 공인된 ‘제대로 된’ 인생의 경로이기 때문이다.
이 경로를 부정하면 인생의 실패자로 지정되고 모든 사람의 동정을 받는 불쌍한 사람이 된다.
‘어찌 저 나이 먹고도 결혼도 못하고 저리 사누’란 소리를 듣는다는 거다.
내가 자의로 결혼하지 않기를 선택했는지,
혹은 정말 인생 엉망진창이라 결혼 못했는지는 그들의 관심사 밖이다.
세상은 내가 몇 살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나이에 맞는, 사회가 세팅한 무언가를
했는지 안 했는지로 인생을 재단한다.
동갑내기 중에 나보다 먼저 결혼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오롯이 가지고 있는 친구는
머리에 뭐가 들었든, 인격이 어떻든,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하든지를 모두 떠나
‘저 사람 좀 보고 배우라’는 역할 모델이 된다.
이게 바로 계급성이다. 하나의 인생길을 규정해놓고 그걸 적시에 따라가지 못하면
처진 인생으로 규정하는 어처구니 없는 획일성과 단순함.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쯤으로 생각하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바이러스 같은 계급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계급장’을 양산해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집, 자동차, 그리고 여자들의 가방이다.

집은 그 한국사회의 계급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계급장이다.
여기 똑같이 서른 다섯 먹은 두 남자가 있다고 치자.
한 명은 강남 도곡동에 48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반지하 월세방을 살고 있다.
이에 한국 사회는 단칼에 전자를 높은 계급으로, 후자를 낮은 계급으로 평가한다.
이십 대에 번듯한 내 집을 가지고 있으면 미래가 보장된 훌륭한 신랑감으로 인식이 되며
마흔 줄에도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불쌍한 소시민으로 낙인 찍힌다.
역시나 그 사람 중심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풍토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른 월세, 전세를 벗어나 내 집을 가지기 위해,
좀 더 큰 집으로 가기 위해 평생 동안 상환해야 할 빚도 무리해서 져가며,
지금 만끽할 수 있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아낌없이 포기해가며 바둥바둥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

차는 집보다 훨씬 시안성이 좋은 계급장이다.
집의 경우 찾아가거나 어디 사는지 물어야만 알 수 있지만
차의 경우 상대적으로 쉽게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차의 파급력은 주로 남자에게 한정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차의 브랜드와 종류가 만들어내는 계급성을 잘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베르나는 마티즈보단 앞서나 아반떼보단 아래고,
소나타는 아반떼와 그렌져 사이에 있다는 식의 등급 말이다.
좀 더 말해보자면 그랜져 위엔 오피러스가, 그 위엔 제네시스, 다시 그 위엔 에쿠스가 있으며,
SUV에서 싼타페는 그렌져 수준이고 베라크루즈나 모하비는 그보다 한 단계 위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차들의 등급이 곧 차를 모는 사람의 등급이 된다.
단적인 예로 내가 아반떼를 타다가 그렌져를 사면 사람들이 우와! 감탄사를 내뱉는다.
더 높은 수준의 삶으로 진급을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렌져가 아니라 마티즈로 가면 왜 그러냐고 의아하게 여긴다.
계급을 부정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용도에 따라 차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위 등급의 큰 차로 가는 것이 기본이다. 혼자 사는 사람도 소나타 다음에는 그렌져나 그 윗 등급의 차를 산다.
사회의 계급성이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현상이다.

(둘 중 더 비싼 차는 무엇일까? 여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다)

반대로 여자들의 계급장은 가방이다.
이십 대 초반 때는 좀 덜한데, 이십 대 중 후반, 삼십 대 넘어가면
노화로 말미암아 얼굴, 몸매가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퇴색되고
서로간의 차이도 흐릿해지기가 일반이다.
따라서 이 시절부터는 얼굴이나 몸매 대신 주인의 아름다움,
즉 계급을 드러낼 수 있는 매개체가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빽, 가방이다. 남자들하고는 상관없다.
남자들은 동대문표 가죽가방과 테스토니 가방을 구분할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들은 상대방의 가방이 무슨 브랜드이고 얼마 정도인지 쉽사리 간파한다.
아니, 간파만 하고 마치면 좋으련만
그 간파한 가방에 대한 정보로 계급 분류까지도 순식간에 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여성이라면
루이비똥이나 그 수준의 가방 하나를 딱 들고 나타나주는 것이
지금 ‘정상적으로’ 단계를 밟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에르메스나 디올 백을 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같은 나이 대의 여자들이 쉽게 들 수 없는 비싼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단계를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집이나 남자의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한국 사회에선 이들은 자기가 잘 나가고 있다는,
혹은 적어도 뒤쳐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급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둘 중 더 비싼 가방은? 남자들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뻔한 인생의 경로를 구태의연한 가치관, 물질주의적 기준으로 세팅해 놓고
이에 따라 철저히 사람의 단계를 평기하고 있다. 이런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는
수도 없이 많은데, 무엇보다 인생의 다음 코스가 항상 정해져 있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우며
그 코스 자체를 이탈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 낳고, 나아가 애들 좋은 학교 보내고,
그러면서도 나이에 맞는 괜찮은 집과 평균 이상은 되어 보이는 자동차,
모두가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 수준의 명품백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 단계를 달성한 뒤엔 다음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살아야 하는,
어찌 보면 너무도 한심하고 불쌍한 삶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도 그런 계급성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외제차를 몰게 된 친구에게 감탄사를 날리고
내 집 마련 성공한 녀석에게 다 이루었구나 하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게 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생의 가치는 그런 일률적인 계급으로 매겨질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풍성히 음미함으로써 인생의 가치를 구가하고,
어떤 이는 쉴 새 없는 창작활동으로써, 어떤 이는 남을 돕고 섬김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집이나 자동차, 가방이라는 계급장을 들이댄다면 그들은
말단 이등병 수준의 형편없는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가 스스로 생각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그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만들어낸 물질적 계급성을 자유로이 뛰어넘어
위대하면서도 독특하고, 또한 멋진 삶을 사는 것이라 확신한다.

나 역시 사회가 규정하는 내 계급은 현저히 낮을지언정
내 스스로 평가한 높은 단계에 이르렀음을 기뻐하며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나 계급성에서 자유로운 배우자가 아닐까 한다.
아내가 옆에서 끊임없는 세상적 계급으로 나를 평가하고
넓은 집, 좋은 차, 명품백을 가지자고 날 쪼아댄다면 내 어찌 독서를 즐기고
글 쓰는 것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나만의 행복공식을 영위할 수 있겠으며,
남들과 차별화된 특별하고도 독특한 삶을 구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명품백 들먹이는 여자를 너무도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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