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유통업체인 우리 회사가 커피 전문점 사업에 뛰어든 것은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
줄어드는 매출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 다각화를 구상하다가
커피 전문점 운영 사업을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업체는 여럿 있었고,
이미 상당한 인기를 누리던 차라 선점주자들과 아무런 차별화 없이 무작정 들어갔다간
초반에 흠씬 두들겨 맞고 백기를 흔들 것이 자명했다.
뭔가 다른 게 필요했다. 이에 회사가 내놓은 것이 고급화 전략이었다.
좀 더 좋은 원두와 원액을 사용한 프리미엄급의 비싼 커피를 판매하고,
용기나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좋은 소재를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커피 전문점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점을 어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매장수를 늘여나가긴 하되 마구잡이 식 확장을 피하여
브랜드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너무 경쟁이 심한 곳이나 낙후된 지역에는 확장을 하지 않으며,
매장 주인에 대한 심사도 진행하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신 일단 오픈한 매장에는 다른 업체와는 달리 저리대출과 같은 재정적인 지원이나
정기적인 교육과 하드웨어 업그레이드 등을 충분히 제공해주었다.
축약하자면 ‘좋은 사람과 좋은 지역을 제대로 골라 제대로 맡긴다’는 정책이었는데,
이게 또 제대로 먹혔다. 예상치 못한 많은 수의 매장개설 신청이 접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청이 많이 밀리다 보니 회사에서는 심사업무만 전담하는 팀을
별개로 분리하여 운영하기로 했고, 그 팀장으로 선정된 것이 나였다.
식품 유통 쪽에서 비슷한 업무를 계속해왔던 경험과,
초기 몇 개의 직영 매장을 세울 때 좋은 자리를 골라낸 안목을 인정해준 것이다.
나 역시 회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발로 뛰는 현장 확인과 다양한 분석을 통해
적절한 판단을 계속해 왔으며, 그 성과는 매장별 매출의 증가와 높아져 가는 회사 이미지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이런 경험과 성공 사례에서 빚어진 심사결과에 대한 확신은
K를 대함에 있어서도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면, 귀사에서는 허가를 내 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간 무슨 고생을 했는지, 한층 더 오그라져 보이는 K는 생크림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진
정체 모를 갈색의 음료수에 빨대를 꽂으며 따지듯이 물었다.
커피의 한 종류이긴 한데, 우유에 카라멜에 생크림에 시럽까지 듬뿍 들어가 있어 맛은커녕
커피향도 제대로 나지 않을 것 같은, 야릇한 음료였다.
까페모카, 헤이즐넛, 까페라떼 등 커피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음료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지만,
기본은 어디까지나 아메리카노다. 아메리카노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커피 전문점이라면
다른 음료의 맛은 보나 마나이다. 그저 우유나 시럽을 잔뜩 부어 단 맛만 내는 정도며,
그런 맛으로는 중고생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공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커피 맛을 안다고 자부하는 주 타겟층, 그러니까 이삼 십대 젊은 층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K는 여전히 커피 전문점을 경영할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보였다.
당신에겐 도저히 우리 회사의 매장을 맡길 수가 없네요.
“네. 여러 방면에서 검토한 결과 말씀하신 그 빌딩 1층에 매장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위험성이 너무 크다고 판단됩니다.”
K는 굳이 나를 만나서 설명을 듣고자 했다.
마냥 거부하는 것도 너무 냉정한 일인 것 갈기도 해서 난 그를
네 번째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매장으로 불러냈다.
그는 한 걸음에 달려와 내 앞에 앉았다.
생크림을 산처럼 쌓아 올린 정체불명의 음료수를 한 손에 들고선.
“좀 자세하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음료수가 그 이유입니다.
“밖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지역에는 유동인구 대비 너무 많은 커피 전문점들이
몰려있고 하나하나가 양호한 운영력을 보여주고 있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저희 팀의 조사에 따르면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기존 매장들도 점차 감소하는 매출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사장님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희 회사로서는 이렇게 치열한 구역에서 저희 회사의 새로운 매장을 내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브랜드 가치를 위해 신중할 수밖에 없는 저희 회사의 입장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돌려 말하는 나의 입장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다른 구역을 원하신다면 성실히 검토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매장 위치를 변경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른 곳에 매장을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K는 확고했다. 본사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말투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겐 그를 설득시키고 싶은 마음도, 설득시켜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난 다음 구역으로 가서 다른 심사를 진행해야 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좋은 결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난 형식적인 인사를 던지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K는 목례로 나를 보내며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매장 문을 밀고 나가면서 한 번 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까 내가 바라보던 창 밖의 풍경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에 테이블 위에 부서지던 햇살은 그의 이마 위로 올라가 깊숙이 새겨져 있는 주름들과
지저분하게 얽히고 있었다. 난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매장 밖으로 나갔다.
아까 받지 못했던 딸의 전화가 생각났다. 딸은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남자친구와 싸웠어요. 아주 심하게. 아빠 말이 맞아요. 그 남자, 나와 맞지 않아요.
미래도 보이지 않고 비전도 없는 사람이에요. 결혼이라도 하면 제가 고생할 게 눈에 훤해요.”
“……”
“그래서 헤어졌어요.”
딸은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듯 말을 뱉어냈다.
머리가 멍해졌다. 칭찬을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머리 속을 뒤적이며 할 말을 찾았지만 아무 단어도, 문장도 건져지지 않았다.
대신 딸이 끝내 하지 않은 말, 혹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자, 이제 마음에 드세요?’
몇 주가 지났지만 딸은 정말 그 남자와 다시 만나지 않는 듯 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다시 만나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말에도 혼자 집에 있을 때나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러울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답이라고,
곧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와 헤어진 후 내가 그랬듯,
딸애도 곧 아무렇지 않은 듯 훌훌 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난 계속 매장개설 신청을 접수하고, 심사하고, 합격과 불합격 판정을 냈다.
합격 판정이 나면 신청자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전했고, 불합격 판정은 전화로 얘기하거나
아랫사람을 시켰다. 신청은 점점 많아져 갈수록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현장 확인을 위해 주말도 희생하기 일쑤였고, 밤늦게 들어가는 것도 예사였다.
정신 없이 달리다 보면 내가 다리를 움직이는 것인지, 다리가 나를 움직이는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호되게 넘어져봐야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게 그 깨달음은 갑작스레 왔다.
줄어드는 매출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 다각화를 구상하다가
커피 전문점 운영 사업을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업체는 여럿 있었고,
이미 상당한 인기를 누리던 차라 선점주자들과 아무런 차별화 없이 무작정 들어갔다간
초반에 흠씬 두들겨 맞고 백기를 흔들 것이 자명했다.
뭔가 다른 게 필요했다. 이에 회사가 내놓은 것이 고급화 전략이었다.
좀 더 좋은 원두와 원액을 사용한 프리미엄급의 비싼 커피를 판매하고,
용기나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좋은 소재를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커피 전문점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점을 어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매장수를 늘여나가긴 하되 마구잡이 식 확장을 피하여
브랜드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너무 경쟁이 심한 곳이나 낙후된 지역에는 확장을 하지 않으며,
매장 주인에 대한 심사도 진행하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신 일단 오픈한 매장에는 다른 업체와는 달리 저리대출과 같은 재정적인 지원이나
정기적인 교육과 하드웨어 업그레이드 등을 충분히 제공해주었다.
축약하자면 ‘좋은 사람과 좋은 지역을 제대로 골라 제대로 맡긴다’는 정책이었는데,
이게 또 제대로 먹혔다. 예상치 못한 많은 수의 매장개설 신청이 접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청이 많이 밀리다 보니 회사에서는 심사업무만 전담하는 팀을
별개로 분리하여 운영하기로 했고, 그 팀장으로 선정된 것이 나였다.
식품 유통 쪽에서 비슷한 업무를 계속해왔던 경험과,
초기 몇 개의 직영 매장을 세울 때 좋은 자리를 골라낸 안목을 인정해준 것이다.
나 역시 회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발로 뛰는 현장 확인과 다양한 분석을 통해
적절한 판단을 계속해 왔으며, 그 성과는 매장별 매출의 증가와 높아져 가는 회사 이미지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이런 경험과 성공 사례에서 빚어진 심사결과에 대한 확신은
K를 대함에 있어서도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면, 귀사에서는 허가를 내 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간 무슨 고생을 했는지, 한층 더 오그라져 보이는 K는 생크림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진
정체 모를 갈색의 음료수에 빨대를 꽂으며 따지듯이 물었다.
커피의 한 종류이긴 한데, 우유에 카라멜에 생크림에 시럽까지 듬뿍 들어가 있어 맛은커녕
커피향도 제대로 나지 않을 것 같은, 야릇한 음료였다.
까페모카, 헤이즐넛, 까페라떼 등 커피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음료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지만,
기본은 어디까지나 아메리카노다. 아메리카노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커피 전문점이라면
다른 음료의 맛은 보나 마나이다. 그저 우유나 시럽을 잔뜩 부어 단 맛만 내는 정도며,
그런 맛으로는 중고생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공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커피 맛을 안다고 자부하는 주 타겟층, 그러니까 이삼 십대 젊은 층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K는 여전히 커피 전문점을 경영할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보였다.
당신에겐 도저히 우리 회사의 매장을 맡길 수가 없네요.
“네. 여러 방면에서 검토한 결과 말씀하신 그 빌딩 1층에 매장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위험성이 너무 크다고 판단됩니다.”
K는 굳이 나를 만나서 설명을 듣고자 했다.
마냥 거부하는 것도 너무 냉정한 일인 것 갈기도 해서 난 그를
네 번째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매장으로 불러냈다.
그는 한 걸음에 달려와 내 앞에 앉았다.
생크림을 산처럼 쌓아 올린 정체불명의 음료수를 한 손에 들고선.
“좀 자세하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음료수가 그 이유입니다.
“밖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지역에는 유동인구 대비 너무 많은 커피 전문점들이
몰려있고 하나하나가 양호한 운영력을 보여주고 있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저희 팀의 조사에 따르면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기존 매장들도 점차 감소하는 매출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사장님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희 회사로서는 이렇게 치열한 구역에서 저희 회사의 새로운 매장을 내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브랜드 가치를 위해 신중할 수밖에 없는 저희 회사의 입장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돌려 말하는 나의 입장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다른 구역을 원하신다면 성실히 검토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매장 위치를 변경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른 곳에 매장을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K는 확고했다. 본사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말투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겐 그를 설득시키고 싶은 마음도, 설득시켜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난 다음 구역으로 가서 다른 심사를 진행해야 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좋은 결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난 형식적인 인사를 던지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K는 목례로 나를 보내며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매장 문을 밀고 나가면서 한 번 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까 내가 바라보던 창 밖의 풍경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에 테이블 위에 부서지던 햇살은 그의 이마 위로 올라가 깊숙이 새겨져 있는 주름들과
지저분하게 얽히고 있었다. 난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매장 밖으로 나갔다.
아까 받지 못했던 딸의 전화가 생각났다. 딸은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남자친구와 싸웠어요. 아주 심하게. 아빠 말이 맞아요. 그 남자, 나와 맞지 않아요.
미래도 보이지 않고 비전도 없는 사람이에요. 결혼이라도 하면 제가 고생할 게 눈에 훤해요.”
“……”
“그래서 헤어졌어요.”
딸은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듯 말을 뱉어냈다.
머리가 멍해졌다. 칭찬을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머리 속을 뒤적이며 할 말을 찾았지만 아무 단어도, 문장도 건져지지 않았다.
대신 딸이 끝내 하지 않은 말, 혹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자, 이제 마음에 드세요?’
몇 주가 지났지만 딸은 정말 그 남자와 다시 만나지 않는 듯 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다시 만나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말에도 혼자 집에 있을 때나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러울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답이라고,
곧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와 헤어진 후 내가 그랬듯,
딸애도 곧 아무렇지 않은 듯 훌훌 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난 계속 매장개설 신청을 접수하고, 심사하고, 합격과 불합격 판정을 냈다.
합격 판정이 나면 신청자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전했고, 불합격 판정은 전화로 얘기하거나
아랫사람을 시켰다. 신청은 점점 많아져 갈수록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현장 확인을 위해 주말도 희생하기 일쑤였고, 밤늦게 들어가는 것도 예사였다.
정신 없이 달리다 보면 내가 다리를 움직이는 것인지, 다리가 나를 움직이는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호되게 넘어져봐야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게 그 깨달음은 갑작스레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