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예전엔 취업시 하는 면접 인터뷰 중 단골 질문 중으로 이런 게 있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생각해도 이는 참으로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다. ‘당신은 뭣 하는 사람입니까’ 식의 질문이면 차라리 쉽다. 나로 치자면 ‘대구에서 태어나 현재 대전에서 거주하고 있는 삼십 대의 직장인이며 미혼입니다’와 같이 객관적인 사실들만 나열하면 되니까 밀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이 아닌 내적인 가치를 묻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답할 수 있지 않다.
물론 이런 질문에도 모범답안이라는 게 있긴 하다. 아마도 인터넷 취업관련 사이트에서는 아직도 이런 류의 답을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저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으로서 늘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래, 번드르르한 게 좋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당신이 면접관이라면 이 말을 믿을 것인가? 믿지 말아줬으면 한다. 이 답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표현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러한 사람인지에 대한 진위여부의 문제와 더불어, 여름철 아스팔트 위에 한껏 피어 오른 아지랑이처럼 느낌만 전해줄 뿐 실체를 뚜렷하게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 말을 믿어?)
그런데, 사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렇듯 ‘매사에 긍정적이다’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자기의 어떤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서 야기된 것일 수도 있을 터인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객관성도 없고, 표현도 애매모호하다라는 점에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다시 말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또 그리 강력히 믿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소리다. 좀 현학적으로 말해보자면, ‘인식’은 ‘진실’과 궤를 달리 하는 것이기에.
여기 똑같이 살인을 저지른 두 명의 범죄자가 있다고 치차. 한 사람은 스스로를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 한 생명을 죽인 악한 사람이라 인식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영웅이라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면 어떨까. 잘 아시다시피, 이들에 대한 판단은 법에 따를 뿐, 두 사람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이 인식하는 바가 진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그대로 돌려 받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말과 우리의 인식을 믿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난 이 시리즈를 통해 몇 가지 기준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개발했다 라기보다는 여러 선각자들의 주장을 모아서 정리를 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시도가 되리라 생각한다.
첫 번째는 당신이 쓰는 ‘돈’과 ‘시간’이다. 당신이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디에 시간을 쓰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좀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자원은 돈과 시간 밖에 없다. 자신에게,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모든 방법 또한 돈과 시간으로 수렴될 뿐이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추상적인 자원들을 얘기하곤 한다. ‘사랑’, ‘관심’, ‘신경’, ‘노력’, ‘젊음’, ‘열정’, ‘최선’ 등등…… 하지만 이는 앞에서 말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 애수가 깃든 눈빛에선 진실이 느껴지고 마주 잡은 두 손에서는 떨림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해 자그마한 선물 하나 사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밥 한끼 사는 적이 없다. 또한 그는 당신과 시간을 보내려 하지도 않는다. 전화를 걸어도 바쁘다고 빨리 끊으려고 하고 피구왕 통키의 불꽃슛을 피하듯 당신과의 만남을 요리조리 피하기만 한다. 언젠가 좋은 곳을 함께 가자, 좋은 것을 같이 먹자, 말만 할 뿐이지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전혀 당신에게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다. 자, 질문. 그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헷갈리신다면 내가 대신 답을 말해주겠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여러 가치들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을 동반하지 않은 ‘최선’은 결코 최선일 수 없고, 돈을 등에 업지 않은 ‘관심’은 진정한 관심이 되기 어렵다. 난 돈이 없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냐, 라 따지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간과 돈은 서로 치환이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에 돈이 없다면 시간을 쓰면 된다. 실제로도 우리는 많은 경우 그렇게 하고 있다. 불우이웃 돕기에 관심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천 만원을 헌납할 수도 있지만 주말마다 어려운 가정에 연탄배달을 나가거나 독거노인들의 어깨를 주물러 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밖에서 시달리며 고된 일을 하시는 부모님들은 비록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할 지라도 그 시간을 들여 가족들이 먹고 살 돈을 만들어오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충분히 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사용 가능한 단 두 개의 자원 – 돈과 시간 – 이 우리를 규정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돈과 시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연인을 위해 100만원을 쓰는 사람이 만원을 쓰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졌다 볼 수 없고, 빅뱅 오빠들을 위해 100시간을 쓰는 여고생이 한 시간을 쓰는 여중생보다 더 큰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순 없다. 남하고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분자 못지 않게 분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논해봐야 한다. 돈이 몇 억씩 남아 도는 사람한테는 100만원의 돈이 옷 한 벌 가격도 안 될 만큼 대단치 않겠지만 한 달에 100만원 겨우 버는 사람에게 이 돈은 한 달 월급의 전부다. 두 사람이 동일한 돈을 어딘가에 다 썼다면 분명 후자가 그 대상을 향한 마음이 더 크다 볼 수 있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와 몇 시간을 썼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가지고 있는 중에서, 혹은 몇 시간을 가지고 있는 그 중에서 어느 정도를 썼느냐 인 것이다.
자, 우리는 크든 적든 시간과 돈이라는 자원을 모두다 가지고 있다. 이건 누구랑 비교할 것도 없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기에 둘 다 100%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내가, 하루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일년이든, 특정 기간 동안 어디에 이 자원들을 투자하였는가를 정리하여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면, 그 리스트는 아주 친절히, 그리고 상세하게도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것이다. 허울좋은 감상에서 나온 무게 없는 말과 바람 한 번에 허리가 휘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식보다는, 당신의 시간표와 당신의 카드 명세서가 훨씬 명확한 답을 말해준다는 소리다.
여자친구에게 돈과 시간을 가장 많이 썼는가? 그럼 당신은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회사 일에 무엇보다 많은 시간을 썼는가? 당신은 회사일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다. 명품백을 사느라 일년 연봉의 절반을 다 써버렸는가? 미안하다. 당신은 된장녀라 불려도 할말 없는 사람이다. 골프 치는 것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가? 그럼 당신은 가족보다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떤가, 이런 기준. 패션잡지 맨 끝에 나오는 심리테스트식 자아찾기나 그냥 막연히 난 이런 사람일거야, 암 그렇고 말고 식의 헛물 들이켜기보단 한결 현실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 기준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서 남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에도 긴요하게 쓰일 수 있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그들의 말만 듣지 말고 그가 어디에 돈과 시간을 쓰는지를 보라. 그 항목이 당신과 잘 맞아 떨어진다거나 혹은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면 같이 미래를 설계해도 좋겠지만, 당신이 너무 싫어하는 분야에 돈과 시간을 퍼붓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카드 명세서는 무얼 말해주고 있는가?)
돈 얘기가 자꾸 거론되다 보니 왠지 물질주의자처럼 비춰질까 좀 마음에 걸리기도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가용자원에 대한 문제니까 오해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그럼, 바쁘시겠지만 잠시 짬을 내어 최근에 어디에 돈과 시간을 많이 들였는지 한 번 생각해보심이 어떨까? 그 동안 난 다음 글을 준비할 테니 말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생각해도 이는 참으로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다. ‘당신은 뭣 하는 사람입니까’ 식의 질문이면 차라리 쉽다. 나로 치자면 ‘대구에서 태어나 현재 대전에서 거주하고 있는 삼십 대의 직장인이며 미혼입니다’와 같이 객관적인 사실들만 나열하면 되니까 밀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이 아닌 내적인 가치를 묻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답할 수 있지 않다.
물론 이런 질문에도 모범답안이라는 게 있긴 하다. 아마도 인터넷 취업관련 사이트에서는 아직도 이런 류의 답을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저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으로서 늘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래, 번드르르한 게 좋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당신이 면접관이라면 이 말을 믿을 것인가? 믿지 말아줬으면 한다. 이 답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표현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러한 사람인지에 대한 진위여부의 문제와 더불어, 여름철 아스팔트 위에 한껏 피어 오른 아지랑이처럼 느낌만 전해줄 뿐 실체를 뚜렷하게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 말을 믿어?)
그런데, 사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렇듯 ‘매사에 긍정적이다’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자기의 어떤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서 야기된 것일 수도 있을 터인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객관성도 없고, 표현도 애매모호하다라는 점에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다시 말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또 그리 강력히 믿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소리다. 좀 현학적으로 말해보자면, ‘인식’은 ‘진실’과 궤를 달리 하는 것이기에.
여기 똑같이 살인을 저지른 두 명의 범죄자가 있다고 치차. 한 사람은 스스로를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 한 생명을 죽인 악한 사람이라 인식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영웅이라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면 어떨까. 잘 아시다시피, 이들에 대한 판단은 법에 따를 뿐, 두 사람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이 인식하는 바가 진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그대로 돌려 받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말과 우리의 인식을 믿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난 이 시리즈를 통해 몇 가지 기준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개발했다 라기보다는 여러 선각자들의 주장을 모아서 정리를 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시도가 되리라 생각한다.
첫 번째는 당신이 쓰는 ‘돈’과 ‘시간’이다. 당신이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디에 시간을 쓰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좀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자원은 돈과 시간 밖에 없다. 자신에게,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모든 방법 또한 돈과 시간으로 수렴될 뿐이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추상적인 자원들을 얘기하곤 한다. ‘사랑’, ‘관심’, ‘신경’, ‘노력’, ‘젊음’, ‘열정’, ‘최선’ 등등…… 하지만 이는 앞에서 말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 애수가 깃든 눈빛에선 진실이 느껴지고 마주 잡은 두 손에서는 떨림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해 자그마한 선물 하나 사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밥 한끼 사는 적이 없다. 또한 그는 당신과 시간을 보내려 하지도 않는다. 전화를 걸어도 바쁘다고 빨리 끊으려고 하고 피구왕 통키의 불꽃슛을 피하듯 당신과의 만남을 요리조리 피하기만 한다. 언젠가 좋은 곳을 함께 가자, 좋은 것을 같이 먹자, 말만 할 뿐이지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전혀 당신에게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다. 자, 질문. 그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헷갈리신다면 내가 대신 답을 말해주겠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여러 가치들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을 동반하지 않은 ‘최선’은 결코 최선일 수 없고, 돈을 등에 업지 않은 ‘관심’은 진정한 관심이 되기 어렵다. 난 돈이 없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냐, 라 따지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간과 돈은 서로 치환이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에 돈이 없다면 시간을 쓰면 된다. 실제로도 우리는 많은 경우 그렇게 하고 있다. 불우이웃 돕기에 관심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천 만원을 헌납할 수도 있지만 주말마다 어려운 가정에 연탄배달을 나가거나 독거노인들의 어깨를 주물러 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밖에서 시달리며 고된 일을 하시는 부모님들은 비록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할 지라도 그 시간을 들여 가족들이 먹고 살 돈을 만들어오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충분히 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사용 가능한 단 두 개의 자원 – 돈과 시간 – 이 우리를 규정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돈과 시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연인을 위해 100만원을 쓰는 사람이 만원을 쓰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졌다 볼 수 없고, 빅뱅 오빠들을 위해 100시간을 쓰는 여고생이 한 시간을 쓰는 여중생보다 더 큰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순 없다. 남하고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분자 못지 않게 분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논해봐야 한다. 돈이 몇 억씩 남아 도는 사람한테는 100만원의 돈이 옷 한 벌 가격도 안 될 만큼 대단치 않겠지만 한 달에 100만원 겨우 버는 사람에게 이 돈은 한 달 월급의 전부다. 두 사람이 동일한 돈을 어딘가에 다 썼다면 분명 후자가 그 대상을 향한 마음이 더 크다 볼 수 있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와 몇 시간을 썼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가지고 있는 중에서, 혹은 몇 시간을 가지고 있는 그 중에서 어느 정도를 썼느냐 인 것이다.
자, 우리는 크든 적든 시간과 돈이라는 자원을 모두다 가지고 있다. 이건 누구랑 비교할 것도 없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기에 둘 다 100%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내가, 하루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일년이든, 특정 기간 동안 어디에 이 자원들을 투자하였는가를 정리하여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면, 그 리스트는 아주 친절히, 그리고 상세하게도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것이다. 허울좋은 감상에서 나온 무게 없는 말과 바람 한 번에 허리가 휘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식보다는, 당신의 시간표와 당신의 카드 명세서가 훨씬 명확한 답을 말해준다는 소리다.
여자친구에게 돈과 시간을 가장 많이 썼는가? 그럼 당신은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회사 일에 무엇보다 많은 시간을 썼는가? 당신은 회사일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다. 명품백을 사느라 일년 연봉의 절반을 다 써버렸는가? 미안하다. 당신은 된장녀라 불려도 할말 없는 사람이다. 골프 치는 것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가? 그럼 당신은 가족보다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떤가, 이런 기준. 패션잡지 맨 끝에 나오는 심리테스트식 자아찾기나 그냥 막연히 난 이런 사람일거야, 암 그렇고 말고 식의 헛물 들이켜기보단 한결 현실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 기준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서 남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에도 긴요하게 쓰일 수 있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그들의 말만 듣지 말고 그가 어디에 돈과 시간을 쓰는지를 보라. 그 항목이 당신과 잘 맞아 떨어진다거나 혹은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면 같이 미래를 설계해도 좋겠지만, 당신이 너무 싫어하는 분야에 돈과 시간을 퍼붓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카드 명세서는 무얼 말해주고 있는가?)
돈 얘기가 자꾸 거론되다 보니 왠지 물질주의자처럼 비춰질까 좀 마음에 걸리기도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가용자원에 대한 문제니까 오해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그럼, 바쁘시겠지만 잠시 짬을 내어 최근에 어디에 돈과 시간을 많이 들였는지 한 번 생각해보심이 어떨까? 그 동안 난 다음 글을 준비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