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연재하는 소설로, 짧게짧게 끊어서 자주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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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 한 잔, 뜨거운 걸로.”
오늘의 네 번째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머리를 뒤로 당겨 묶은 동그란 얼굴의 여점원이 아메리카노 한 잔 말씀이십니까,
사이즈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며 내 말을 받았다.
작은 걸로. 건성으로 대답하며 점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갓 스무 살을 넘지 않은 듯, 뽀얀 피부 곳곳에 피어있는 여드름이 눈에 들어왔다.
의식했는지 못했는지, 점원은 날 보며 생긋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입력하고 카드를 받아 결제를 처리했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밝은 웃음이 보기 좋았다. 잘 훈련되어 있음을 첫 눈에 알 수 있었다.
지갑을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고 매장을 한 번 둘러보았다.
원목 스타일의 타일로 덮인 바닥과 고급스러운 벽돌로 장식한 기둥들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사이엔 어떻게 심었는지 제법 키 큰 나무도 몇 그루 초록색 차양을 드리우며 서 있었다.
커피 전문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시선을 채 거두기도 전에 따뜻한 온기를 두른 머그잔이 눈 앞에 내밀어졌다.
손님이 없긴 했지만 시스템이 상당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잔을 받아 들고 앉을 자리를 찾으니 흔히 말하는 ‘좋은 자리’들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테이블 위에 하얗게 흩뿌려진 창가 자리 하나를 골랐다.
매장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앉은 자리를 비롯한 몇몇 자리는
얼핏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가 보이는 좋은 재질의 소파를 쓰고 있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걸, 하는 생각이 조그마한 한숨이 되어 새어 나왔다.
창 밖을 바라보니 지하철 역 입구를 겨드랑이에 낀 넓은 사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3층에 위치한지라 내려다 보는 광경이 꽤나 시원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1층보다는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대형 쇼핑몰 건물 내에 위치해 있고
지하철 역에서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로 바로 연결되는지라
젊은 고객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입지였다.
머그잔을 들어 한 모금 맛을 보았다. 강한 향이 코를 자극함과 동시에
진한 액체가 목을 긁으며 넘어왔다. 사람에 따라서는 쓰다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농도,
이 커피 전문점 프랜차이즈에서 내세우는 맛 그대로였다. 표준화가 잘 되어 있다는 증거다.
일반적으로 같은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이라 해도 어느 매장이나 동일한 맛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똑같은 원두나 원액을 공급받는다 할지라도 이를 어떻게 보관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제조시 물의 량과 온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커피 전문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다 보니
바리스타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새파란 아르바이트생들이 직접 커피를 내리는 경우도
빈번히 볼 수 있는데, 그런 곳의 커피 맛은 동네 다방 커피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고,
손님이 먼지 털리듯 떨어져나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도
수시로 매장을 돌아다니며 점검을 하거나 주기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등
매장간 편차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고개를 들어 거리를 바라보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오늘 이미 다녀온 다른 커피 전문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내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로 맞은 편 길가에 위치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편의 높다란 건물 2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여기서 보이진 않지만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이만하면 아무리 역세권이고 유동인구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 구역에 새로운 매장이 들어설만한 여지는 거의 없는 셈이었다.
게다가 오늘 각 매장들을 직접 방문해보니 하나같이 좋은 시설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점원들은 친절했고 커피 맛 또한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매장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키는 것으로 결론은 났다.
K에겐 직접 연락하기로 했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여니 액정 화면에 부재중 전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딸이었다.
일이 우선이니 일단 K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는 몇 번 벨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그에게 난 부러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상권은 안 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불합격입니다..”
말을 하면서 가방에서 K가 제출했던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리고는 와이셔츠 앞 주머니에 꽂혀있는 만년필을 꺼낸 후 서류의 맨 하단, 박스로 구분되어 있는
심사결과란에 ‘불합격’이라 정자로 적었다. 심사자란에 내 서명을 기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K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2부는 9월 22일 업뎃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