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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이다를 좋아합니다

문★성 2009.04.16 20:25 조회 수 : 105

핸드폰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고장이 아닐까, 전원이 꺼진 건 아닐까, 하여 몇 번이나 폴더를 열어 확인해 봤지만 전혀 이상이 없었다. 점점 더 마음이 초조해졌다. 핸드폰의 발신 메시지 함을 열어 문자를 보낸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밤 9시 2분. 정확히 47분이 지났다. 이 정도면 그가 문자를 보고도 남을 시간이다.  

서로 연락을 주고 받지 않은지 일주일이 지났다.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 지난 주말 이후 서로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완전히 연락을 끊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그 날 공연장에서의 그 남자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답답하여 조금 화가 난 것뿐이었다. 자기가 섰어야 할 무대라며, 구석진 자리에서 쉬지 않고 한숨을 내쉬다 끝내는 눈물까지 흘리는 남자의 모습에 짜증내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물론 그 심정이 전혀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름 잘 나가는 밴드의 보컬로서, 목이 몇 달 째 전혀 낫지 않아 결국 자기가 서기로 한 무대조차 동료에게 양보해야 했던 것은 충분히 한숨을 내쉴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당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투정을 받아주기도 싫었고 건성으로 위로를 주어 섬기기도 싫었다. 아무리 연하의 남자라지만 항상 참고 이해해줄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회사일과 하루에 세 번은 결혼하라고 압박하는 주위의 성화, 펀드에 집어넣다 반토막 난 결혼 자금과 급속하게 망가져 가는 몸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기에, 모나리자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주며 그를 안아줄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지난 일주일 동안은, 그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공연장을 훌쩍 나와버린 자신에게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라고 생각했다.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그 날 이후 전혀 연락이 없는 그의 태도 또한 ‘그는 치졸하고 한심한 남자이며 나는 마땅한 행동을 한 것 뿐’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마치 가위에 눌린 듯 그의 느낌이 몸을 휘감아왔다. 가발이라도 씌우면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 웃을 때 드러나던 가지런한 치아까지, 그의 모습이 마치 내 눈 앞에 있는 듯 선명하게 떠오른 후 하루 종일 지워지지 않았다. 덕분에 출근할 때도, 일을 할 때도, 퇴근할 때도 마음 한 구석에 돌이 하나 박힌 것처럼 답답한 심정이었다. 하다못해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의 쉰 목소리와 숨 쉬듯 끊임없이 계속하는 그의 기침까지도 귓가에 그리움으로 고이는 듯 했다. 그 날의 분노가 가라앉고, 연락 없는 그에 대해 느꼈던 서운함이 잠잠해지자 그간 묻혔던 그에 대한 애정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결국 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도 먹지 않고 고민하다 끝내 먼저 연락하기로 한 것이다. ‘나이 많은 내가 참아야지. 안 그래도 애 같이 여린 사람이니, 누나인 내가 양보해야지.’하는 자기 합리화도 겨우 구상해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금새라도 그 컬컬거리는 쉰 목소리로 미안하다라 말해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문자를 보낸 것은 몇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전화를 해야할지 문자를 보내야할지, 문자를 보낸다면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그 날엔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라든가 ‘니가 미친듯이 그리워’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난 그보다 세 살이나 많고 사회경험도 많은 누나니까. 차라리 오빠, 미안해, 하며 매달릴 수 있는 입장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10시 14분. 그에게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조금 더 무거워진 마음을 느끼며 핸드폰을 놓는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다시 펴들었는데 화면에 뜬 이름은 그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별 내용은 아니었고, 그냥 밤중에 집에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하셨다고 했다. 혼자 사는 노처녀 딸이 걱정이 되시는지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꼭 전화를 주시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차분히 전화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런 마음을 아시는지 아버지는 주무실 거라고 금방 전화를 끊어주셨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니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그 남자의 쉰 목소리와 귀속에서 마구 뒤섞여 중화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반복재생을 거듭하던 그의 목소리가 겨우 잠잠해진 듯 했다.   

사실 그의 진짜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 만날 때부터 이미 목이 쉬어 있었으니까. 듣기로는 진탕 술을 마신 어느 날 밤, 혼자 기타를 부여 잡고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불렀다는데, 그 날 쉬어버린 목이 몇 달이 지나도 전혀 회복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가고 매일 약을 먹고 있어도, 나와 만나는 석 달 동안에도 그의 목은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었다.

술에 한 번 크게 데였기 때문일까. 소개팅 자리에서도 그는 사이다만 몇 잔씩 리필해서 마셔댔고, 그 후 같이 호프집을 가도, 클럽을 가도 언제나 사이다였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사이다를 좋아하냐고 물으니, 그는 목이 상한 후 우연찮게 한 번 마셔보니 은근히 맛도 있고 목소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 즐겨 마시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도 사이다를 마시면 일순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깨끗하게 들리기도 했다.

탄산음료가 목에 좋지 않다고 말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는 '난 사이다를 좋아하는 걸' 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모습이 왠지 순수해보여 좋았다. 사이다 반 컵 정도를 한 모금에 삼키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던 그의 모습이, 조금은 맑아진 목소리로 '좀 괜찮아?'하며 묻던 그의 모습이, 그런 그와 함께 마주 앉아 있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를 만나고 싶다. 다시 만나고 싶다.

시간을 확인해보기 위해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그 때, 전화가 또 왔다. 화면에 뜬 이름은 그 사람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받았다.

“어. 여보세요?”

“어……. 나야. 연락 늦게해서 미안해”

전화를 건 사람은 분명 그였다.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며, 웬만한 여자 못지 않은 높은 소리였다.

“목이, 다 나은거야?”

“응. 나은 것 같애. 후훗. 웃기지? 갑자기 나아버렸다니까.”

게다가 그는, 취해 있었다. 그것도 완전히.

“술, 마신 거야? 목이 나았다고 바로 그렇게 마시면 어떡해? 또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구?”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옛날에 마시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냐.”

“그래도……”

“걱정하지마. 괜찮아. 그리고 나 얘기할 게 있어.”

“뭔데?”

“솔직히 말할게. 누나 만나는 동안, 사실 친구들이 많이 말렸었어. 나이도 몇 살이나 많고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은 누나를 왜 만나냐고. 뭣보다 누나는 음악을 모르니까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는 얘기도 들었구.”

“…….”

“그런데, 그런 말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누나 만날 때마다 나 되게 즐겁고 좋았거든. 누나도 언제나 내 말 잘 들어주고 많이 양보해주는 게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단 말이야?”

“이런 말 하면 나 너무 유치해보일지도 모르겠는데, 그 날, 누나가 나 버리고 간 날, 그 때 처음으로 친구들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 아니, 그 때는...... 그 때는 내가 좀 상황이 안 좋았단 말야."

"......."

"넌...... 항상 그랬어. 늘 네 생각만 해.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거야?"

난 어느새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아니, 알어. 누나 마음. 그동안 내가 되게 한심하고 미워보였겠지. 나 같아도 아마 짜증 엄청 났을거야. 그 마음 알지. 그래서, 더 미안한거야.”

"그래서, 지금 그 얘기하는 의도가 뭐야? 그 일 때문에 헤어지자는 거야?"

"......미안해."

"말도 안 돼. 고작 그런 일로...... 너 지금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거니?"

“......."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이해할 수 없어."

“나, 이제 사이다 마시지 않아."

"난데 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목이 나으니까, 못 마시겠더라. 아니, 사이다 때문에 목이 낫지 않은 것 같기도 해.”

"무슨 뜻이야?"

“아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잘 지내.”

전화가 뚝 끊어졌다. 전파가 닫힘과 동시에 심장과 뇌의 활동이 동시에 정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핸드폰을 닫지도 못한 채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생소하기 만한 그의 목소리와 생소하기 만한 냉정한 말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까지 내게는 모두 어렵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입이 마른 사막처럼 갈라지는 듯했다. 탈진된 몸을 이끌고 기어가듯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여니 맥주 두 병과 사이다 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가끔 집에 놀러오곤 해서 맥주는 나를 위해, 사이다는 그를 위해 사 놓은 것이었다.

고민하지 않고 사이다 캔을 따 목에 들이다 부었다. 탄산음료 특유의 따끔거림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마치 물 마시듯 한 캔을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하지만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목 말라......."

순간,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생전 들어보지 못한 쉰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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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소설을 써봐야지'하고 자리에 앉아
구상에서 완성까지 정확히 110분 걸린 완전 날림초단편소설입니다.
구성과 인물설정이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분량을 감안해서 이해해주시구요. (대체 왜 쓴거냐-_-;)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사이다 하나 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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