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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안 보시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요 아래 글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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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날을 잡아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 영화를 배우고 싶어. 당신도 알지? 내가 줄곧 영화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거. 한 번 더 해보고 싶어. 물론 당신과 성주가 고생할 것은 아는데 내가 잘 되면 이게 우리 가족에게는 더 좋은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그, 이수씨라는 사람 때문이지? 맞지?”

“……응.”

“당신 기분 알 것 같아. 친구는 영화를 하는데, 그것도 자기가 썼던 글을 가지고 저렇게 하는데 당신은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화 나고 속상한 거잖아.”

“……”

“하고 싶으면 해. 나 때문에 당신 꿈 놓치는 것 보고 싶지 않아. 아내로서의 도리도 아닌 것 같고. 그렇지만 걱정이 좀 되긴 하네. 영화는 어떻게 배울 생각인데? 회사는 계속 다닐 수 있는 거지?”

아내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던지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나는 영화 아카데미를 들어갈 것이라는 것과, 10개월 정도의 과정을 이수해야 하니까 할 수 없이 회사는 1년 정도 휴직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휴직을 하더라도 복직에 있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는 점 등 며칠 동안 알아본 내용을 아내에게 소소히 말해주었다. 더불어 잘 안 될 경우 금방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아내는 지금 우리 살림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 1년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며,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허락해주었다. 그 마음 속에 차오르는 불안을, 걱정을, 답답함을 알 것도 같았다. 평소 같으면 아내가 힘들고 괴로워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려 했을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아내와 나누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희생을 못 본채 하고 싶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욕심대로 하고 싶었다. 그것이 종국에는 아내와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스스로의 논리를 합리화해야만 했다.

그\후로는 정신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우선 영화 아카데미에 입학부터 해야 했다. 나이가 많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다행히 나이 제한은 없었다. 하지만 그냥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면접도 있었고 간단한 작품도 하나 심사 받아야 했다. 급히 예전에 썼던 시나리오를 머리 속에서 짜내어 가족들을 주인공으로 짧은 영상으로 제작하여 제출했다. 성주는 영화를 찍는다니 재미있다고 야단이었다. 다행인지 전형은 별 무리 없이 통과하여 입학할 수 있었고, 회사에는 집에 일이 있다고 1년간의 무급 휴가를 제출했다. 내년쯤 차장 진급을 앞두고 있던 터라 동료들은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크게 말리거나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다행히 회사 사정도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었고 최근 다른 부서에서 전례도 있는 모양이니 휴직을 쓰는 것이 그리 까다롭지도 않았다. 물론 돌아가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아내에게는 1년뿐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간에 뚜렷한 길을 개척해내지 못하면 군말 없이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영화 아카데미 생활은 나름 괜찮았다. 애초부터 자신감은 충만한 상태였다. 내 재능은 이미 대학교 때 증명이 된 바이고 이수의 영화를 통해서도 일정 부분 검증된 바니까 지금 막 영화계에 발을 들어놓은 새파란 이십 대에 비하면 앞서도 많이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필기시험을 친다거나 실기시험을 쳐보면 내 성적은 늘 상위권에 속했다. 자신감은 점점 더 붙어갔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배움을 통해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제법 컸다. 점점 집에 DVD를 쌓아놓고 예전처럼 종일 영화에 푹 빠져 있는 날들이 늘어갔다. 아카데미에서도 상현과 같은 좋은 동생들을 만나고 어느새 큰 형님 대접을 받으면서 기분 좋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자연스레 조성이 되어주었다. 동생들은 나이가 한참 많은 나를 인정하고 잘 따라주었는데 나도 그들의 톡톡 튀는 생각으로부터 얻는 것이 적지 않았다. 깊이 묻혀있던 꿈이 비로소 땅을 뚫고 나왔는데, 이제는 그 꿈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손만 길게 뻗으면,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확 끌어당겨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흥분되는 시간이었다. 적어도 처음으로 응모한 단편영화제의 결과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방 소도시에서 개최하는 아주 작은 영화제였다. 우리 아카데미에서도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제도 역사와 관련된 것이라 아무래도 경쟁이 될만한 젊은 층들의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영화제를 감독으로 가는 첫 발판으로 생각한 것은 그만큼 만만했기 때문에 입상을 통해 객관적 인정을, 공인된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떨어졌다. 입상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허탈했지만 잘 털어내고 첫 술에 배부를 리 없다는 자조와 함께 두 달 뒤에 다른 영화제에 다시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연속으로 여섯 번의 단편영화제에 응모하였는데, 단 한 번도 입상하지 못하였다. 모조리 떨어진 것이다.


                                             *****


약속한 1년의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갔고 아까 회사에는 복직서류를 제출하고 오는 길이었으니 오늘 발표되는 일곱 번째 도전이 전력으로 도전하는 영화제로는 마지막인 셈이었다. 시간도 시간인데 마침 저축한 돈도 상당부분 썼고 아내도 둘째를 임신한 상태니 아무래도 다시 원래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터였다. 부모님과 처가의 반대 또한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더 이상은 설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심 이번에 또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회사의 휴가를 몇 개월 더 연장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 꼭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주말이나 퇴근 후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오랫동안 묵혀놨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간 빛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저녁 식사하는 내내 복직 이야기를 했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사람들은 전처럼 잘 대해줄지, 승진이나 연봉 인상에 안 좋은 영향이 오지는 않을지 등등.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더욱 아내는 가능하면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하기야 남편이 한 번도 아닌 여섯 번을 내리 실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럴 줄 알았다느니,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느니 하는 잔소리를 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고마웠다. 아내를 위해서라도 오늘 꼭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는 설거지를 시작했고 나는 성주와 잠깐 놀아주다가 그림책을 읽으라고 시키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다. 벌써 8시 30분이 다 되었다. 분명 발표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상현이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아내가 방에 들어오지는 않을까 부엌의 설거지 소리에 신경을 쓰며 조심스레 다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이번엔 아까처럼 로딩이 길지 않았고 기다렸다는 듯 ‘제X회 XX 단편영화제 수상작 발표’라는 팝업 창이 바로 떠 주었다. 발표가 난 것이다. 심장이 다시 북소리를 내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창을 클릭했다. 메인 화면이 흰색으로 바뀌고 새로운 화면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창 아래쪽에 페이지 로딩 정도를 알리는 녹색 바가 점점 채워져 갔다. 눈을 꼭 감고 내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제발 보여라. 제발. 최우수상이 아니라도 상관 없으니 입상이라도 하자. 제발.

그렇게 한 5초 정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침내 당선을 축하합니다, 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사람들의 이름이 보였다.


최우수상 김□□
우수상 박□□, 최□□, 김□□
장려상 ……


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심사위원 특별상이나 인기상 명단에도 내 이름과 내 작품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낯익은 이름 하나가 보였다. 상현이었다. 장려상 다섯 명 중에 하나로 올라와 있었다. 떨어질 것으로 보았던 트렌스젠더의 이야기가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내 작품을 보더니 자기 것보다 몇 배는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조금은 과장된 칭찬과 다름없었던 것일까. 떨어지면 언제나 먼저 연락해오던 녀석이 지금 전화도, 문자도 없는 것은 나에 대한 배려, 그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일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검은 눈물이라도 배어나올 듯 했다. 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크게 뱉어졌다.

일곱 번째 도전이지만 이번엔 많이 달랐다.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영화제에 비해 더 많은 준비를 했고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밤을 새면서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고 대학로를 돌아 다니며 괜찮은 연기지망생들을 캐스팅했다. 녹음장비나 촬영장비 서슴없이 모두 좋은 것으로 빌렸었고 배경이 되는 농촌에서 직접 촬영하기 위해 배우들을 데리고 강원도에 1박 2일로 다녀오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한 셈이다. 완성작도 내 스스로 만족을 느낄 정도로 잘 나왔고 아카데미 사람들의 평가도 좋았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나 내 이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자리에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었다.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실패구나.

“여보. 뭐해요? 과일 먹어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설거지가 끝난 모양이었다. 아까 내 한숨 소리를 들었을까. 일단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난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섰다.

“성주는?”

“방에 들여다 보냈어요.”

“왜?”

“당신이랑 얘기 좀 하려고.”

아내의 냉랭한 말투에 긴장이 되었는지 침이 꿀꺽 삼켜졌다.

“어…… 그래? 무슨 얘기인데.”

“오늘 맞죠? 발표일.”

“……알고 있었나 보네.”

“잘 안 된 것 같은데, 맞죠?”

“음…… 그런 것 같아. 상현이는 상 하나 탔더라고. 아무래도 이번엔 시나리오가 좀 약했던 것 같아. 조금 더 손을 볼 걸 그랬어.”

“여보.”

“응?”

“수고했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하지만 이걸로 끝이에요. 더는 안 돼요.”

“아니, 이제 좀 손에 잡힐 것도 같거든……”

“1년 동안 충분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요. 그 동안 말은 많이 안 했지만 많이 힘들었단 말이에요. 이젠 당신이 약속을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부탁할게요. 힘들 텐데 위로가 되지 못해 미안해요.”

아내는 말을 마치고는 일어서더니 성주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답게 과격하거나 극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만약 내가 이 길을 고집한다면 분명 아내는 이혼이나 별거와 같은 수단을 택할 것이다. 더는 안 된다는 그녀의 말은 최후통첩이나 다름 없었다. 7년 동안 살면서 저렇게 강하게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내가 들어간 후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데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상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발신인을 알리는 창에는 모르는 핸드폰 번호가 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으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이수다. 잘 있었냐?”

작년 시사회장에서 본 후 매일 같이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어떤 때는 이 이름에 부러움을 느꼈고, 어떤 때는 이 이름에 분노를 느꼈고, 어떤 때는 두 가지 감정을 같이 느끼기도 했다. 바로 그 이름이 날 찾은 것이다. 하필이면 이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반가워해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했다.

“어, 영화감독 이이수? 야, 정말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고? 요즘 잘 나가던데?”

“그렇지. 뭐 너는 잘 지내고? 뭐하고 지내냐?”

“나는 뭐, 결혼해서 애 낳고 회사 잘 다니며 잘 살고 있지. XX은행 알지? 거기 다니고 있어. 영화감독님에 비해서는 영 초라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말이야. 하하.”

“어. 그래? 되게 좋은 곳에 다니는구나. 잘 됐네. 난 또 혹시나 했지. 그런데 너 그렇게 큰 회사 다니면서 용케도 영화 하나 찍었네? 대단하다야.”

가슴이 철렁했다. 이수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무슨 말이야?”

“XX 단편영화제 말이야. 거기 너 단편 하나 내지 않았냐? 맞지?”

“…...아! 거기 말이구나. 깜빡 하고 있었네. 아니 너는 내가 거기 낸 걸 어떻게 알아?”

“내가 그 영화제 심사 봤잖아. 나름 장편영화 세 편 발표한 중견감독이라고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데가 많아. 사실 썩 내키지는 않았는데 요즘에는 특별히 찍고 있는 작품도 없고 하니까 하기로 한 거지. 그런데 응모자 명단에 보니까 네 이름이 있는 거야. 네 이름이 또 어디 흔한 이름이냐? 그래서 좀 알아보니까 맞는 것 같더라고. 생년월일도 맞고. 여기 핸드폰 번호도 찍혀있길래 전화해 본거다.”

“……그래? 세상 참 좁구나. 신기하다. 어떻게 네가 거기 심사위원이냐. 허, 참.”

아찔했다. 왜 심사위원 명단을 진작에 확인하지 않았을까. 이수가 심사를 봤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응모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다음 녀석의 말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냥 끊고만 싶었다. 배터리가 나갔다고 하고 그냥 끊어버리고만 싶었다.

“응. 난 또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몰랐구나.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냐. 상이 안 가서.”

“아이구. 야. 괜찮아. 그냥 취미 삼아 한 건데. 상 탄다 하더라도 영화 계속 할 것도 아니고. 그냥 심심풀이로 한 거야. 걱정 마.”

“그러면 다행이다. 내가 웬만해서는 본심까지는 올리려고 했거든. 알다시피 본심까지만 올라가면 장려상 정도는 나오잖냐. 그런데 다른 심사위원 들이 말을 안 듣는 거야.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기본기가 부족하다나? 알다시피 내가 이론만 따지는 사람들 정말 싫어하잖아. 게다가 네 작품, 다소 손 볼 데가 있긴 해도 나름 괜찮은 구석도 있고 해서 괜찮게 보였거든. 그렇지만 그 영감탱이들이 네 작품 세계를 도통 이해를 못하더라. 아. 나 정말 답답해서.”

“어……그래?”

“그래. 아 나. 정말 명색이 심사위원이 되어가지고 친구 하나 못 밀어주고……미안하게 됐다.”

“말이라도 고맙다. 참, 나 지금 회사에서 미팅하다가 전화 받은 거거든. 다시 전화할게. 그래, 고마워.”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손에서 땀이 나 핸드폰이 흠뻑 적셔져 있었다. 가슴이 너무도 뜨거웠다. 이수의 말 때문인지, 수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한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아내의 경고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모든 상황이 한 데 엉켰기 때문인지 심장에서 심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자리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부엌으로 달려가 차가운 물 한 컵을 벌컥 들여 마셔보았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는 뜨거움은 전혀 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슴 부근에 근육의 통증인지, 아니면 그 안쪽의 아픔인지 구별할 수도 없었지만 숨이 콱 막혀올 정도로 아팠다.
참을 수가 없어 욕실로 뛰어 들어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옷이 금새 젖었다. 물의 방향을 틀어 왼쪽 가슴, 심장 부위를 때리게 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열이 좀 식을 것 같았다. 식어라. 제발 식어라.

내 삶을 원위치 시키고자 했다. 고개를 돌리고만 있던 꿈으로 내 삶을 날려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숱한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꿈은 여전히 멀리 있었고 금방 따라잡을 것만 같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시기를 놓친 탓인지, 꿈이 변질된 탓인지, 애초부터 망상에 불과했던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고 보면 꿈을 그냥 멀리 있는 꿈으로 두었던 때가 차라리 행복했던 것도 같다. 밤하늘의 별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주지만 그 별에 직접 가고자 한다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고 결국 그 별에 닿지 못할 수도 있지 않는가. 난 왜 나이가 마흔이 다 되도록 왜 그런 지혜 한 조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원위치는 꿈을 좇는 삶이 아니라 꿈을 잊고 살았던 불과 1년 전의 내 삶이었던 것이다.

차가운 물에 닿아 가슴이 마침내 식어 주어서인지, 그 식으면서 발생되는 수증기가 척추를 타고, 식도를 타고 올라와서인지 얼굴이 몹시 뜨거웠다. 손을 들어 만지니 뭔가 뜨끈한 것들이 얼굴을, 볼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거실에서 나를 찾는 성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내가 있어야 할, 그리고 벗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 원위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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