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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계속 무거운 글 썼으니, 간만에 기름 잘 먹은 습자지처럼, 노홍철 윗입술처럼, 김태희 몸무게처럼 가벼운 주제를 한 번 다뤄보자. 이번엔 패션에 대한 이야기이다.

1. 누구나 촌스러운 시절은 있다

‘객관적 판단’이라는 기치 아래 은근 개인 혹은 집단적 편견에 의해 판단되는 ‘야 너 완전 촌스러워’라는 수식어는 시기와 정도만 다를 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운명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지금도 주간야간 가리지 않고 저렴한 촌티를 마구 방사하는 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세련되고 도시적이며 자기만의 특별한 스타일을 표방한다 자부하는 당신도 분명 촌스런 시절이 있었다. ‘어? 우리 엄만 내가 어릴 때부터 각종 명품 옷과 액세서리로 꽃단장을 해주셨는데? 나 완전 공주님 뺨 후려치고 다녔는데?’ 후훗.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그랬더라도 그 전에 기저귀 차고 눈물콧물로 마스크팩을 해대며 손가락 세 개씩 뭉뚱그려 원조 뚱뚱이할매 족발 먹듯 질질 빨아대던 당신은 인체공학적 촌티 제조기에 다름 아녔다.

일단 이 글은 작정하고 내 개인적인 얘기 쓰려고 시작하는 거니까, 내가 첫 번째 촌티를 벗은, 그래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로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될 수 있었던 기념비적인 시절의 이야기로 시리즈를 시작해볼까 한다.

때는 1998년, 대구에서만 19년을 고이 자란 나는 갓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갑작스레 혼자 살라는 지상명령을 받게 되었다. 지금껏 11년을 꽉꽉 채운 자취인생이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인생 이리 될 지 전혀 몰랐기에, 스무 살 사내아이라면 으레 그렇듯 대책없이 설레는 맘으로,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을 혼자 흥얼거리며(그래봤자 ‘오등은 자에’ 까지가 한계지만), 상경을 준비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막상 짐을 주섬주섬 싸다 보니 입을 옷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 사는 것, 빠는 것, 다리는 것, 입는 것 등등……  ‘옷’이 들어간 문장은 죄다 귀찮아한 나로서는 당연한 상황. 그래도 대학가면 일주일 내내 사복입고 다녀야 하고, 게다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그 무시무시한 서울에 살고자 가는 것이니 베어갈 만한 콧대가 전혀 없는 나로서도 추가적인 준비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집에서 추가로 사주신 옷도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마뜩하지가 않아서 그나마 젊어 보이는 아버지 옷들을 여러 벌 더 챙긴 것이다. 그리고 입학한 후 3, 4월은 그 옷들을 꽤 자주, 많이 입었었다.

이 정도는 입어도 될 것 같다, 싶은 옷들만 선정하였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와 나는 같은 양띠로 나이차가 꽤 난다. 다시 말해 스무 살의 나는 오십 대 중반의 아버지가 입었을 때 '그나마 젊어보이는' 옷들을 입고 다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옆머리 구레나룻을 기르시고 형형색색의 화가용 빵모자를 구비하신데다가 이름있는 브랜드 옷도 좋아하실 만큼 예술가라는 직업에 걸맞은 스타일을 자랑하는 분이지만, 그 옷들은 스무 살의 내가 입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허나 당시 패션에 대한 개념이 ‘티셔츠는 입을 때 앞뒤와 안팎을 잘 구분해야 한다’, ‘양말이 바지 위로 올라오면 좀 그렇다’, ‘흰양말 신고 샌달 신으면 세상이 미워한다’ 정도 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질 좋고 색깔 좋고 비싼 그 옷들이 좋기만 했다.

그런데, 상당히 아저씨스러운 오로라를 배경음악 삼아 돌아다니는 내게 그 어느 누구도 촌스럽다 라든가, 스타일 좀 바꿔보라고 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본향 친구들이야 나보다 더 심해 티셔츠 손목 부분으로 톡 튀어나온 내복을 마치 레이어드인양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놈들이었으니 서로 침 뱉을 일 없었고,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은 은근히 예의들이 가지런히 발라 남의 스타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달을 장미란과 김연아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것 같은 불균형 속에 살아가다가 한국 역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개화’에 필적할 만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미팅과 소개팅이라는, 신체건강한 스무 살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가야 할 인생의 필수코스에 발을 담그면서 내 돈으로 옷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아, 물론 내 돈이 아니라 용돈이지만, 어쨌거나 용돈으로라도 내가 옷을 직접 골라 사 입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좋은 옷은 살 돈 없었으니 친구들과 우루루 스크럼을 짜서 신림동이나 가리봉 같은 상설할인매장거리를 누빈다던가 이대나 밀리오레 쪽의 보세옷을 산다던가 하는 정도였는데, 초반 몇 번의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점차 조금씩 스타일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같이 옷 사러 돌아다니던 신모군처럼 망사 티셔츠를 사지는 않았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었다.

당시 주위의 반응은 대단했다. 대단? 오버하고 앉았네, 코웃음 치시며 스크롤 확 내려버리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그럴만도 했다. 갖은 찬사와 인정, 칭찬과 더불어 이런 소리까지 들었었다니까.

‘너 그러고 보니 제법 잘 생겼네?’

우와. 얼굴에 대한 어마어마한 콤플렉스 땜시 고등학교 때는 내 얼굴을 일기장에 세세히 그려가며 ‘여기도 못 생겼고 저기도 못 생겼고’ 하며 징징대던 내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로부터(사실 가족도 거의 안 해줬지만)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어찌 ‘대단했다’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아. 눈가가 촉촉해져 버렸다.  

그런 즐거운 한 학기가 지나가고 어느새 스무 살의 가을이 되었다. 이 글 어머니가 보시면 죽통을 날리신 후 샤프슈터를 걸어버리실 것 같은데. 그 힘든 IMF 시절 어렵게 보내주신 한 달 용돈을 옷 사는데 80% 써 버리고, 초코파이와 농심 튀김우동으로 끼니를 연명하기도 했던 나이지만, 여름 방학 때는 본가에서 조신하게 지내느라 가을 옷을 사기 위한 비자금을 미처 조성하지 못한 채 2학기를 맞이해야 했다.


- 샤프슈터 -

그래서 할 수 없이 봄에 입고 다니던 아버지 옷을 입고 학교를 갔더랬다. 9월이나 4월이나 날씨는 거기서 거기니까. 그런데 갑자기 몇몇 애들이 난리가 났다. 방학 때 양궁의 본고장으로 전지훈련이라도 갔다 왔는지 맹비난의 화살을 내게 마구 쏴대는 것이었다. 지난 학기에 자주 입고 다니던 옷이라고 항변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신기했다. 애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것보다도 그들은 이미 스타일이 한 단계 업 된 상태로서의 나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운그레이드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나의 복고복장은 그 후 등장한, 방학 때 갑자기 머리를 최신 중국풍 스님스타일로 빡빡 밀어버린 김모군과 쌍꺼풀 수술을 하여 눈 크기를 두 배 정도 확장해버린 이모군의 포스로 인해 금방 묻히고 말았지만, 그 때의 깨달음, 즉 스타일이란 것은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마음 속에 나라는 사람을 심어주는 어떤 ‘힘’이구나, 라는 것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연 패션에 대한 관심은 그 때부터 더욱 커지게 되었다.

아. 그렇다고 내가 너무너무 멋있어지고 빤짝빤짝 빛이 났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상황을 재조명해보자면 스타일 점수가 15점짜리였던 애가 이리저리 좀 꾸밈으로써 한 49점으로 급상승한 것인데, 그래도 평균으로 보자면 여전히 난 촌스러움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 이런 사람들이 늦바람 들면 ‘과격’과 ‘과감’을 질겅거리기 마련. 너무 급격하고 무리한 경제발전을 경험한 탓에 한 동안 두통치통생리통십이지장통에 시달려야 했던 지난 날의 대한민국처럼 98년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마주친 문성은 대략 이런 꼬라지를 하고 있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레깅스 재질의 흰색 쫄티(그것도 소매는 칠부였다)에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달고 다니던 시커먼 십자가 목걸이, 커터칼로 너무 뜯어 아래 위가 분리될 위기에 처한 빈티나는 빈티지 청바지와 이를 우악스럽게 여며주는 주먹만한 버클이 달린 가죽벨트. 보스턴백이라고 하지만 누구 봐도 보스턴 지하철에서 숙식하시는 마이클 아저씨의 것으로 보이는 둔탁한 가방까지.아 젤로 묶다시피하여 윗입술에 닿을 때까지 내리고 있던 몇 가닥 머리카락을 빼먹을 수도 없겠구먼.  

'야. 너 좀 달라졌다고 그러더니만, 그래봤자 연변에서 짜장면 배달하는 조선족 날라리 수준이구만.'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 때는 그게 또 트렌드였고, 스타일이었다. 매달 키키나 에꼴 같은 패션잡지를 정독해가며 키운 안목으로 추구한 코디였단 말이다.

참, 왜 여자잡지를 샀냐하면, 당시에도 에스콰이어 같은 마초용 잡지가 있긴 했는데 스무 살이 볼만한 책은 '진짜' 아니었다. 온통 기백만원 대의 정장과 시계 얘기로 가득한데다 가격도 달라로 표시된게 수두룩. 시쳇말로 '이거 뭥미'였다. 여성잡지는 키키가 괜찮았다. 거의 빠지지 않고 '남자친구를 위한 스타일 맞춤법!'과 같은 기사가 몇 페이지씩은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을쯤에는 백화점가서 예쁘다고 사 온, 가슴팍에 굵은 줄 들어가 있고 몸에 촥 달라 붙는 브이넥 니트가 다음 달 키키에서 '가을에 입을 만한 예쁜 옷'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근데 모델이 여자였다. 이거 여자옷이었나. 한참을 비통해했었다. (그 옷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여하튼 그런 꼬라지로 교회에까지 등장한 나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긴 하나님의 뜻이려나. 나의 패션Fashion에 대한 패션Passion은 채 1년을 가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촌스러움 of 촌스러움. 모든 촌스러움을 집약하고 있는 패션계의 영원한 적, 에너미. 일명 군바리로 삽시간에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일년 동안 어렵사리 모은 옷들과 지금쯤이면 그 때보단 훨씬 잘 입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한 '그나마 젊어보이는 아버지옷'의 상당 수가 군 입대를 위한 휴학과 함께 기숙사에서 도난(혹은 분실)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내 패션의 1차 각성기를 묻어버리고자하는 거대한 우주적 의지가 작용하는 것만 같았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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