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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다가 너무 졸작인 것 같아서

문성닷컴에도 차마 올리지 못한

"빛을 잃었습니다"에 이은 내 두 번째 소설.

(다른 것도 시작은 많이 했지만 제대로 끝낸 게 없어요)


3편에서 말했듯 본 시리즈의 전체적인 주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냥 수정 안 하고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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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아파트 3층에 있다. 고유가 시대라 전기를 절약해야 되니, 건강을 위해서는 계단 이용을 생활화 해야 한다느니 하는 얘기가 많지만 내 돈 주고 산 아파트다 보니 누가 뭐라 하든 언제나 꿋꿋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차분히 기다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저 멀리 15층에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주저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계단을 발판 삼아 넓이뛰기를 하다시피 하였다. 80kg가 넘는 제법 육중한 몸매가 3층까지 오르는데 20초도 안 걸렸으니 말이다. 그만큼 마음이 다급했다. 급했다.

오늘따라 잘 돌아가지도 않는 낡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뽑듯 문을 열어젖힌 후 누가 뒤에서 밀기라도 한 양 집 안으로 거의 넘어지며 들어왔다. 신발은 문 열기 전부터 이미 벗고 있었고 가방은 문이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런 꼬락서니를 봤으면 필경 조용히 잔소리를 읊어댔을 아내는 집에 없었다. 친정에 다녀온다고 했는데 늦는다고 문자 메시지가 왔었다. 경주도 피아노 학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가족 대신 어둠이 반겨주는 집이 그리 달갑지 않았겠지만 오늘만큼은 집에 아무도 있어주지 않음이 오히려 다행스럽다.  

거실 불을 켠 후 시계를 보니 7시 20분,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이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심장이 큰 북 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됐을까. 핸드폰을 꺼내보니 여전히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와 있지 않았다. 못내 더 불안했다. 분명 내 이름이 올라와 있다면 연락이 왔을 텐데.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내도록 조마조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회사는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날 중에 하필 오늘, 그것도 퇴근시간이 다 된 늦은 저녁에 오라고 한 건지, 그리고 뭔 놈의 복직관련 서류검토는 그렇게 한참 걸리는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날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덕분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뭐 마려운 사람인양 안절부절 못했고 역에서부터는 뛰다시피 하며 집까지 왔다. 이렇게 조바심 나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컴퓨터는 느긋한 속도로 부팅이 되고 있었다. 고물 컴퓨터. 진작에 바꿨어야 했는데. 아직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가뿐 숨을 가누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몇 분 후 마침내 경쾌한 효과음을 내며 부팅이 완료되었고 바로 인터넷에 들어가 허겁지겁 홈페이지 주소를 쳐 내렸다. 접속자가 많은지 고물 컴퓨터의 반항기 때문인지 홈페이지의 로딩은 평소보다도 한참이나 느렸다. 물 위에 떨어진 잉크방울이 군데군데서 퍼져가듯 모니터 여기저기서 조금씩 화면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공지사항이 위치한 가운데 프레임도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내용은…… 새로운 협회장이 취임했다는 공지, 어제와 같았다. 그대로였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목 한 구석에 체한 듯 걸려있던 깊은 숨이 내쉬어졌다. 심장 박동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맥이 풀렸는데 실망감이라기보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7시가 넘어서도 아무 연락이 없기에 필경 떨어졌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다소 마음의 각오를 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상황이면 아직 가능성은 남은 셈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전 공지사항을 다시 확인해봤는데 발표시간은 틀림이 없었다. <수상자는 7월 31일 저녁 7시. 인터넷 공지사항 확인 >.

상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앞에 모셔놓고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녀석은 전화를 대뜸 받더니 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형님! 정말 이 사람들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이 몇 십니까? 좀 있으면 여덟 시라고요. 지금 두 시간 째 컴퓨터 앞에서 새로 고침 버튼만 누르고 있는데, 얼마나 속이 바싹 타는지 지금 입에서 잿가루가 다 묻어 나오고 있다니까요. 젠장. 퉤퉤.”

“너도 참. 다 사정이 있겠지. 진정하고. 그럴 거면 전화라도 해서 물어보지 그러냐.”

“당연히 했죠. 한 이십 번은 걸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 저처럼 전화통 붙잡고 있는 탓인지 계속 통화중이에요. 통 신호가 안 간다니까요. 이거 원 확 달려가서 불을 지르든지 해야지. 원”

“아이고 참아라, 참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좋은 소식은 천천히 온대잖냐.”

“아. 예! 물론이죠, 형님. 오늘은 정말 좋은 소식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형님이 최우수상 받고 제가 우수상 받는 것도 좋고요, 아님 둘이 공동 수상을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네요. 헤헤.”

“하하하.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발표 나면 다시 연락하자. 건승을 비마.”

“네! 전화 드릴게요!”

상현은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보다 한참은 어린 녀석이지만 입도 걸걸하고 밝고 유쾌한 녀석이다. 지금껏 동반 탈락을 경험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기분 좋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녀석 덕분에 나도 덩달아 그리 우울하지 않게 결과에 승복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형으로서 결혼도 안 한 동생보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얘기하다 보면 괜히 내가 상대적으로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녀석이 낸 작품은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로, 조금은 다루기 민감한 주제였는데 제법 시원하게 잘 풀어내었다. 홍대, 신촌의 게이바를 돌아다니며 진짜 트렌스젠더를 섭외해왔을 때는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단지 주인공을 맡은 그 트렌스젠더의 연기가 많이 어색한 것이 좀 아쉬웠다고나 할까. 대사 처리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부분에서 흐름을 좀처럼 타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에게는 너무 좋은 작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지만 입상하기는 사실 좀 힘들 것 같았다.


현관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와 경주의 목소리가 같이 들리는 것을 보니 집 앞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띄워져 있던 인터넷 창을 닫고 게임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아내는 오늘이 발표인 것을 모른다. 말하지 않았다. 또 실패하는 모습, 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무 일 없는 체 하고 있다가 상을 따면 보란 듯이 말하고 싶었다.

아빠! 경주는 나를 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쪼르륵 달려와 안겼다. 번쩍 들어 안아주며 볼에 뽀뽀해주었다. 아내는 장 바구니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안부를 물었다. 오늘 별 일 없었죠? 회사 갔던 일도 잘 되었고요? 그럼. 나는 입을 귀밑까지 찢으며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지금의 불안을 왠지 그녀가 알 것만 같아, 그것이 못내 더 불안했다.  



*****



“여보! 여보! 잠깐 이리 와봐요.”

작년 이 맘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내가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소리쳐 불렀다. 뭔가 해서 다가가보니 <영화 시사회 권 2장 당첨!> 이란 적힌 창이 화면 한 가운데 떠 있었다.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절대 호들갑을 떨지는 않는 아내가 눈웃음을 살짝 그리며 말했다. 영화 못 본지 오래됐죠? 가요.

경주를 낳은 후 영화관을 통 찾지 못하였다. 대학교 때 영화동아리에서 활동도 하고 한 때 영화감독을 꿈꾸는 등 영화와 얽힌 이야기가 조금은 남다른 나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생활의 무게에 점차 그 안타까움마저 묻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공짜 시사회 표를 받아오고 때마침 부모님이 경주도 봐주시겠다고 해서 간만에 한 편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극장 안은 아무래도 시사회인지라 앞에서부터 중간 열까지는 기자나 영화관계자들로 가득했고 그 이후부터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이 자리를 채웠다. 들어설 때부터 안내하는 사람들이 일반인 분들은 가능하면 뒤쪽부터 앉아주세요, 라며 분류를 해주었다. 일반인이라는 말이 묘하게 귀에 남았다. 입구에서 받은 팜플렛을 펴보니 처음 보는 감독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수’라는 특이한 이름의 신인감독이었다. 요새는 감독도 가수처럼 이름을 짓나 보네, 하며 아내에게 농담을 건네니 키득거리며 웃었다. 약력을 보니 나와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등장하여 감독과 배우들을 소개해 자리로 불러 올렸다. 상영 전에 인사부터 하는 모양이었다. 주연을 맡은 남녀 배우는 제법 알려진 젊은 탤런트들로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하는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런 후에 감독이 올라왔는데 인상이 낯익었다. 큰 키에 새까만 각진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목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장발은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만나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머리 속을 뒤져 관련 정보를 찾는 동안 그는 자기 멘트를 마친 여주인공으로부터 마이크를 넘겨 받아 짧은 인사말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감독을 맡은 이수라고 합니다. 처음 맡은 작품이라 많이 서툽니다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단박에 누군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대학 동창 병수였다. 이병수. 가운데 ‘병’자만 빼버리고 가명을 쓴 모양이었다. 영화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한 친구로 십 년도 더 전에 훌쩍 유학을 가 버린 이후론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워낙 매일 같이 얼굴 보며 가까이 지내던 친구라 차림새와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반드시 영화 감독이 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더니, 결국 되긴 된 모양이었다.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보니 반갑기도 했지만 반가움을 몇 배나 넘어서는 무거운 기분이 뒤를 이어 찾아왔다. 영화감독이 된 그의 모습이 내겐 그리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스물 살 때 함께 꾸었던 꿈의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전공이 다른 우린 같은 날 영화 동아리에 가입해서 서로를 알게 되었고 대학 생활 내내 가장 절친한 친구로 지냈었다.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대학생활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 등의 조금은 불순한 동기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였었지만 곧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하여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화에 목을 매고 살았다. 수도 없는 영화를 봤고 수도 없는 시나리오를 썼으며 싸구려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영화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영상들을 마구잡이로 찍어댔다. 그 열정과 생산성은 동아리 선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아마 그렇게 스스로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옆에 나 못지 않은 열정으로 영화를 대하고 있는 병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또한 가장 신경 쓰이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영화 발표회라도 있다 하면 병수와 나는 따로 밤을 새워가며 나름의 역작을 만들어댔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거나 대충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그가 나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칭찬을 받는 모습을 생각하곤 했다. 그럼 금새 속에서 가스통 하나가 폭발하는 것 같아 졸음이 가시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녀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결국 우리는 나름 서로와 나름의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선의의 경쟁도 대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엔딩 크레딧을 올리고야 말았다. 내가 부모님과 상의 후 3학년을 마치자마자 군대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내가 입대한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었다. 다만 가장 큰 경쟁자이자 동반자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이 한풀 꺾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일년에 만들어내는 시나리오나 작품의 수가 눈에 띄게 준 것이다. 가끔씩 하는 전화에서 그는 영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한숨을 토해내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는 얼마 뒤 영화를 더 배우겠다고 유학을 가 버렸고, 이후 제대를 한 나는 당시 꽤나 어려웠던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취업을 준비하느라 자연스레 영화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뭐하고 사는지 통 알 수가 없었는데 어느덧 그는 우리의 꿈을 멋지게 이룬 감독의 모습으로 저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나는 지극히 평범한, 그야말로 ‘일반인’의 하나로 이렇게 녀석의 데뷔작을 지켜보게 되었으니 마음이 복잡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녀석의 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를 아내는 이상하게 여기는 듯 했지만 고맙게도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몸이 심하게 좋지 않은 듯 창백해 보였고 이내 토하듯 몇 번의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입을 막은 손바닥 사이로 검은 물이 흘려 나왔다. 고통에 찌푸려진 눈가를 닦은 소매 자락에 회색 물이 번져갔다. 눈물 역시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남주인공은 그저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분이었다. 여자는 희귀 병에 걸린 것이다.

그 이후는 놀랍게도 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여자를 치유할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지만 오히려 자기도 같은 병에 걸린 채 온 몸에서 검은 물을 내뿜으며 죽어간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기가 병을 옮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사라진 남자를 원망하며 역시 죽어가게 된다.

단 10분을 보았을 뿐인데 모든 줄거리를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길게 볼 것도 없었고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입이 바싹 타고 눈이 뭔가가 누르는 듯 아파왔다.

내 것이었다. 대학교 때 내가 쓴 공포영화 시나리오의 내용 그대로였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너무 잔인하다고 하고 나도 썩 내키지 않아 영화로 찍지는 않았었지만 동아리에 소개는 한 터였다. 특히 매일같이 영화 얘기를 나눈 병수에게는 누구에게보다도 상세하게 설명을 했었는데, 병수는 그 이야기를 가져다가 스크린에 건 것이 분명했다.

영화 보는 내내 위장이 부글부글 끓는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뛰어가 멱살을 잡고 따질 용기도, 기자들에게 사실을 폭로할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게 뻔했다. 그 때 썼던 시나리오들이야 버린 지 오래고 17년 전 시나리오를 기억하는 사람이야 쓴 나와 베낀 병수 밖에는 아무도 없으니 내 시나리오라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셈이었다. 난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눌러가며 영화 끝날 때까지 스크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중간 부분부터는 달라지길, 결말만은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똑같았다. 내가 쓴 것은 단편이고 병수의 영화는 장편인지라 이래저래 추가된 내용이 많았지만 기본적인 줄기는 완연히 똑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사람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일부 사람들은 기립까지 해가면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영화는 괜찮았다 배우의 연기도 좋았고 음악이나 촬영기술, 스토리 전개 또한 크게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그 토대는 병수의 것이 아닌 나의 시나리오였다. 난 기뻐하는 병수의 모습을,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감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아내를 재촉해 얼른 자리를 떠버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병수의 이야기를 했다. 절친했던 친구라고, 같이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던 친구라고, 하지만 우리가 본 영화의 줄거리는 바로 내가 스무 살 때 썼던 그 시나리오라고 말해 주었다. 아내는 기대대로 조용히 그 친구가 나쁘다. 문제 있다고 두둔해 주었고, 내가 쓴 시나리오의 내용이 아주 좋았다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 마음 씀씀이에 위로됨을 느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가 너무 억울하고 답답했다.

다음 날 대학 동아리 친구 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때는 모두 영화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살았지만 생활에 찌든 덕분인지 이수라는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해서 당최 아는 이가 없었다. 당연히 이수가 이병수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가 쓴 시나리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역시 나와 병수뿐이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그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을 찾아보았다. 평균 별점이 다섯 개 만점에서 네 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평가였다. 감독의 자질에 대한 평도 있었는데 이 역시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시나리오에 대해 칭찬한 평론가는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신선하고 독창적인 연출을 하는 감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좋은 평을 차치하더라도 병수는 분명 영화감독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를 끄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버린 것은 오래 전 일이지만, 그래도 그 꿈은 내 가슴 속 한 구석에 산 채로 묻혀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 직장 동료들 앞에서 왕년에 영화 꽤나 좋아하고 작품도 몇몇 만들어내었던 사람이라 가슴 펴고 자랑을 종종 해댈 만큼 그 꿈을 좇았던 시간은 내겐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병수와 그의 영화를 보니 그 꿈이 꿈틀대며 무덤에서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 꿈에 가까이 갔다. 이미 꿈을 잡아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학교 앞 호프집에서 소주잔을 끝도 없이 채우고 비워가며 함께 다짐했던 꿈은 이런 식의 거짓과 사기를 통해서 이루어져서는 아니 될 것이었다. 현실이란 핑계를 대며 그 실크로드에서 두 손 들고 자진 이탈한 나도 그 다짐을 어긴 것이 사실이지만 병수는 정도를 어긋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전혀 다른 길을 가는 동안 그가 착실히 준비하며 꿈에 대한 대가를 치러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 내가 화가 나고 울분을 토한 것은 꿈을 이뤄가는 병수에 대한 배 아픔인지도 모른다. 꿈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길을 가고 있는 한심한 자신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른다.

문득 다시 영화가 하고 싶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원래 내 삶은 그 때의 꿈을 향한 기로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지금은 많이 빗나가 있지만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여겼다. 다시 내 삶을, 있어야 할 그 자리로 원위치 시키고 싶어졌다. 나라고 해서 병수처럼 꿈을 못 좇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제대로 공부해서 도전해본다면 어떨까. 조금 늦긴 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을까. 만다비를 만든 우스만 셈벤 감독만 하더라도 마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 데뷔작을 발표했지 않았던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내 알량한 자존심에 의한 왜곡된 기억일는지는 몰라도 분명 대학교 때의 재능은 병수보다 내가 뛰어났었다. 그는 일주일 걸려야 한 시간 분량의 촬영을 겨우 해올 정도였지만 난 닷새면 편집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뭐랄까,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는 것은 분명히 나였던 것 같다. 동아리 사람들도 병수는 작품이 체계적이고 잘 자리 잡혔지만 창의성이 없다는 평을 내리기 일쑤였지만 나에게는 늘 새롭다, 독특하다라는 평을 내려주곤 했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영화에 대한 확신은 커졌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꼬일 대로 꼬인 잘못된 인생을 정상으로 되돌려줄 운명적인 무언가로 느껴졌다. 병수와의 만남은 이를 위한 분기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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