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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일기.

읽으면서 혼자 키득키득하다가, 쪽팔림을 무릅쓰고 한 번 올려본다.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 생각들.

일기가 없었으면 다시 떠올릴 수나 있었을까? 정말, 이 맛에 일기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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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15일. 일요일]

요즘 룸메이트 이뱀이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아침저녁으로 닭살스러운 말을 속삭이며 ‘저 높은 곳을 향해’ 매진하고자 하는

나의 굳센 마음을 박박 긁고 있다. 덕분에 나도 빨리 하나 사귀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그러고 보니 올 크리스마스나 겨울방학,

연말연시도 또 솔로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는 싫고.

그렇다고 지금의 정신 상태 – 홀몸 가누기도 벅찬 – 에 여자친구를

추가하자니 용량초과 및 CPU 과열로 쓰러질 것 같고.

이거야 말로 딜레마!

……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으나 사실 내가 ‘좋아! 나도 여자친구를 사귀겠어!’라고

표효한다고 해서 수십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싸!’, ‘이 날을 기다렸어!’,

‘기다린 게 보람이 있구나’하며 노도처럼 몰려올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애절한 표정으로 가뜩이나 없는 돈 탁탁 털어가며 따라다녀야 할 형편이니

이거 영 재미없는 일이로다.

‘키작고 돈없고 나이 어리고 얼굴은 귀여운 여자’라는 그다지 휘황찬란하지도 않은,

소박한 이상형인지라 마음에 드는 아낙네가 종종 발견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나 어쩌겠는가, 그림의 떡인걸.

글구 남자 나이 스물 넷이면 여자 얼굴 보고 무작정 말 걸고 보는 때는 지난 거잖아.

게다가 뭐, 첫인상에 자신도 없고 하니

할 수 없이 주위에서 물색해야 할 처지인데, 사회생활 별로 안 하는지라

아는 여자도 몇 없는데 그나마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나를 좋아하지 못하겠다, 이거야.

내가 나를 좋아하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좋아하겠냐고.

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처럼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리’나 ‘키가 작아서리’ 와

같은 이유 때문이기 보다는 우선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다.

외모가 떨어지면 돈이 많거나 성격이라도 멋져야지 이건, 원…..

그래서 일단은 성격부터 개조해야 할 것 같다. 좋은 점도 많고

그리 문제되지 않는 점도 솔직히 많다고 생각하니까 다 제하고 단 둘만 고치자.

 

첫째. 제발 좀 착해지자.

오늘 오후에 OO형하고 약속이 있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기다리다가 음료수 하나 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돈 천원이 아까워서 관둬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도착한 OO형은 보자마자 냉큼 저녁을 사주겠다고, 가자고 했다.

자. 봐라. 형이 돈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치만 내게 있어 돈 천원이 형의 저녁값보다 비싼 건 아니다.

내가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거다.

돈 몇 푼에 연연하고 중요정보를 남에게 잘 얘기해주지 않는 등,

갈수록 야박해져가만 가는 내가 부끄럽다.

좀 더 선해지고 착해질 수는 없는 걸까.

 

둘째, 너무 소심하고 세심하고 걱정많고 늘 초조해하는 성격.

이거 티내지 말자. 내가 봐도 진짜 한심한 모습이다.

남 앞에서 다리 달달 떨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어떡해~’하며 옷자락 붙잡고

끙끙거려봤자 해답 나올 것 없다. 성경에도 나오잖아. 왜 사람에게 의지하느냐고.

걱정있고 불안하면 기도나 하자고. 불쌍한 모습 보이지 말고.

 

그리고, 두 가지만 말하려 했는데, 하나 더 추가하자. 인간관계.

이거 좀 수정하자. 좀 적극적이 되자고.

가만 앉아 있는다고 누가 다가올 나이는 아니라고.

얼굴에 철판 좀 도배질한 다음에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잔 말이다.

분을 삭이고,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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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감당은 못할 것 같고.

그래서 흘린 넋두리 같은데, 저런 생각 했다는 자체가 

지금의 나로선 재밌다.

지금은 저만한 아쉬움도 크게 없고,

이상형 자체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며

스스로에게 느낀 문제들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재밌잖은가. 세월이 지나면서 '바람둥이'라는 소리도 들어보고 (이건 억울하지만)

OO형처럼 동생들에게 밥을 사주는 입장도 되었고

소심하고 초조한 마음 절대 들키지 않게 되어 버렸잖아.

 

그러고보면, 앞으로의 세월은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진다.

아마 그 때면, 지금은 차마 밝히지 못하는, 오늘의 내 일기장에

적힌 답답한 심정을 지금처럼 웃으면서 끄적일 수 있겠지?

나이 들긴 싫은 노릇이지만, 그거 하나는 사뭇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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