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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읽고 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버스나 기차 타고 다닐 때 읽는 게 전부였는데, 올해는 탈 것 안은 물론이고 집, 독서실, 회사 점심시간, 하다 못해 런닝머신 위에 이르기까지 갖은 장소에서 전방위 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너무 책에 빠지다 보니 다른 취미생활에의 투자가 크게 위축되어버릴 정도이다.

작년에 비해 여유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책을 읽으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변화가 지금 내 나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간절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심어준 사람은 역시나 가장 본받고 싶은 사람인 삼일교회의 전병욱 목사님이다. 8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이던 오래된 교회를 지금은 어림잡아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득 메우는 교회로 성장시킨 분으로 요즘은 워낙 유명인이 되어 YES24 이벤트에까지 출연하고 있다.



인상이 좋지도 않고 말도 독설이라고 느낄 정도로 아주 거센 분이지만 그 말에 사람들을 흔들어놓는 힘이 있고 지혜가 있기에 사람들이 저리 몰려들고 또 그 말에 인생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힘의 배경에는 물론 종교인이니만큼 기도와 같은 영적인 능력에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그 못지 않게 본인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독서의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 독서량만 얘기하자면,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신학교로 가신 분인데,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무려 516권의 책을 대출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할 땐 대출왕이라는 상도 받았다는데 당시 레코드로는 선배인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던 기록이란다. 4년 동안 516권이면 대충 나눠봐도 1년이면 129권이고 1주에 2권 이상이다. 지금도 한 달에 수십 권씩 읽는다고 하니 젊어서부터의 독서가 지혜를 창출해냈고 결국 기독교계에서는 정말 놀랄만한 일들을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대학교 때 그보다 더 읽었다는 김우중 회장의 영향력 또한 비록 언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전국적이었고 세계적이었다. 즉, 많이 읽는 사람은 힘이 있다. 깊이가 있다.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남의 인생, 나아가 세상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 초, 그들만큼 책을 읽겠다는 생각으로 겁 없는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나중 생각할 일이고 우선 내 자신부터 좀 변화되자, 더 좋은 사람이 되자는 취지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계속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래서 작년 읽은 량의 2~3배 정도 읽어볼 작정이었고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잘 진행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답답한 기분이다. 책을 많이 읽기 전에는 무작정 많이 읽어야 된다. 다독이 답이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읽다 보니 이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읽자마자 책의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망극한 기억력은 ‘머리 속에 탁 떠오르지 않아도 아마 그 책의 내용이라든가 읽을 때의 느낌 같은 것은 내 혈관 속에 촉촉하게 스며 들었을 거야.’라는 자조적 합리화로 대충 변명할 수 있었지만 너무 쉬운 책, 너무 간단한 책만 골라 읽어 리스트 목록만 채우고 있는 내 스스로의 방만한 독서취향에 대해 느끼는 회의에는 도무지 변명을 들이댈 여지를 만들 수가 없었다.

어떤 분들은 쓸데없이 읽어대는 독서를 ‘잡독’이라 규정, 오히려 피해야 할 것으로 정의 내리고 있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독서들이 딱 그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뮤엘 스마일즈는 ‘자조론’에서 이러한 독서를 ‘지적 방종’이라며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 말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처럼 독서광이 되어 순회도서관의 서가를 가득 채운 쓰레기들을 집어삼키며, 인생의 비상식적인 측면을 살피는 데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쏟아 붓는 것은 단순한 시간 낭비보다 더 해롭다. 그것은 아주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독서도 득이 되고 살이 되는 책을 통해 이루어져야지 무작정 권수만 늘인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 내가 읽은 책 목록만 살펴봐도 대학교 성적 매기듯이 평점을 준다면 C이하를 줄, 그다지 의미없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오자와 논리적 비약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F가 아깝지 않은 책도 있다. 이런 책들마저 한 번 붙잡으면 끝을 봐야 된다는 의무감에 아까운 시간을 쏟아 붓고는 그래도 어쨌거나 리스트에 하나를 더 올렸으니 잘했다는 일종의 ‘지적 방종’을 즐겼던 것이다. 이 역시 책을 많이 읽어 생긴 지혜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미 있는 독서와 의미 없는 독서가 분명히 존재하며 후자로 치우칠 위험이 크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난 주 목요일. 대전에서 진중권 교수가 강사로 나오는 독서토론 모임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이슈도 워낙 많이 만들어왔고 악플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받는 사람 중 하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미학 오디세이 등 이 분 책만 여섯 권 정도 구입해서 읽은, 어디까지나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문성은 독설가를 존경합니다)


www.100booksclub.com에서 불펌

전반적인 강의 내용은 본인이 이번에 새로 낸 책 ‘서양미술사’ 시리즈와 관련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선 디지털 세계의 미술에 대한 것이었는데, 중국신화와 디지털 예술의 형태를 병치로 엮은 강의 내용도 역시 감탄할 만했지만 강의 후 뒷풀이 때 어느 참석자의 질문에 답해준 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앞에서 말한 독서에 대한 회의에 침체되어 있던 내 안면에 시원한 한 방을 날려준 것이다. 맥주 한 캔 들이마신 것처럼 속이 싸한 기분이었다. 내 문체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쉬운 책만 읽으려고 한다. 이해가 되는 책만 읽으려고 한다. 이것은 하드디스크에 정보를 저장하는 것과 같은데, 요즘 같은 시대에 정보를 얻어서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것은 굳이 독서를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은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CPU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쓸 때 비로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교수님이 말한 ‘하드디스크에 정보를 저장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쌓는 것으로, 책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크게 공감한다. 실제로 내 주위에도 한 달에 책 한 권 안 읽는다고 하면서도 온갖 상식을 다채롭게 가지고 있으며 수려한 말빨과 트렌드에 대한 민감성을 자랑하는 분이 적지 않다. 신문이나 인터넷, 개인적인 경험, 혹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을 습득, 저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어려운 책을 노력하면서 읽어 CPU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깊이 생각하면서 독서를 하다 보니 생각하는 능력이 커지고 확장되어 자신이나 주변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을 때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많이 읽게 되자 (적어도 내 기준에서) 책을 무작정 많이 읽는 것이 답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독서에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닐 것이다. 여행을 할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지금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도, 오감으로 들어온 정보들을 그냥 하드디스크로 저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로 보내 한번쯤 깊게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게끔 한다면 똑 같은 경험도, 똑 같은 체험도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4년, 그리고 그 이상 축척 된다면 손바닥만 펼쳐도, 혀만 날름거려도, 귀만 쫑긋 세워도, 코만 킁킁거려도 지혜가 배어나오고, 새어나오고, 흘러나오고, 터져나오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수단은 독서일 것이기에 지금의 나로서는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면서 많이 읽어야할 것임은 자명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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