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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심장용 윤활제

문★성 2008.06.25 22:22 조회 수 : 195

조용한 어느 밤.
하품이 자아낸 눈물이 눈꺼풀에 배어들어서인지
눈이 자꾸만 감겨지네요.
졸음에는 장사 없죠.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 시간인가 봅니다.

……어랴?
문득 밖에서 높은 언성이 들리네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입니다. 몹시 화가 난 듯 하네요.

살짝 열린 창문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는
무슨 일인지 살펴봅니다.

제 나이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와
그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서로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2층 창문을 통해 무단 입장한 관객을 의식 못했는지
여자는 말을 잇습니다. 흥분해서인지 목소리가 꽤나 큽니다.

“말을 해보라니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우물거리며 뭐라고 입을 엽니다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다야? 지금 이게, 미안하다고 해서 될 일이야?”

고맙게도 여자분이 통역을 다 해주는군요.

“하필이면 채은이야? 걔는 내 친구잖아. 어떻게 내 친구와, 난 정말 이해가, 정말…… 흐흑”

위태위태하다 싶었는데 결국 여자분이 울음을 터트립니다.
이거, 눈치 없는 저도 대강 어떻게 된 얘긴지 알 것 같네요.
저 남자, 순진하게 생겨가지고는, 나쁘네요.

조그만 소리로 시작된 울음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여자분은 제 손으로 입을 막지만
거친 소리를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남자분은 어쩔 줄 몰라 그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쩔쩔매고 있구요.  
여자의 눈물이니까요. 그 눈물 앞에 당황하지 않을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요.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 분은 계속 웁니다.
일단 열린 수도꼭지는 잠그기 힘들죠.
저렇게 한 자리에 서서 울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잠시 울음을 멈추시고 근처 벤치로 뛰어가서 앉은 후
다시 재개하시는게 편하실 것 같은데요.

정 안 되면 지금처럼 올곧게 서있으면 무릎 아프니까
짝다리라도 짚은 채 울어도 될 듯 한데
굳이 정자세만 고집하고 계시니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저럴 땐 손수건이라도 꺼내 눈물 닦아주는 게 젠틀맨의 도리일진대,
저 남잔 뭐 하는지,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하네요.
하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고
손이 열 개라도 눈물 닦아줄 손가락은 없겠죠.
손수건 건네주다간 손가락이 잡혀 부러질지도 몰라요.
그저 여자분의 체력이 다 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으로 한심한 모습입니다.

그나저나 정지화면처럼 미동없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슬슬 재미가 없어지고, 잠시 출타 중이셨던 졸음이
어느새 득달같이 달려들어 목 뒤에 턱하니 매달려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 무게 때문에 다시금 하품이 터져나옵니다.

전 창문을 조용히 닫고
자리에 픽 쓰러지듯 누워버립니다.

자, 자. 잡시다.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의 사정이 있는 거고
저는 저대로 먹고 살기 위해 내일 또 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요.

그런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졸렸는데, 눕자마자 드르렁 코라도 골 줄 알았는데
두 눈이 멀뚱멀뚱 합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그러고보니
분명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요동하지도,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는군요.  
끝까지 지켜 보고픈 마음도,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여자분을 위로하고픈 마음도
남자분에게 힐난을 퍼부어 주고픈 마음도 없습니다.
드라마와 영화의 과장된 로맨스에 너무 익숙해져서 일까요.
어느새 무덤덤함이 자연스런 나이대에 돌입했기 때문일까요.
경화(硬化)를 넘어, 석화(石化)에까지 이른 듯
제 심장은 저 장면을 보고 전혀 미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인생에 있어 가장 긴 밤,
가장 힘든 밤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낫지 않을 상처가 지금 막 서로에게 그어졌으며
두 사람은 남은 평생,
2008년 6월 24일을 잊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단 한 명의 관객이자
단 한 명의 증인일 저는
잔인하게도
단지 재미없고
스토리 진행이 더디다는 이유로
저들을 내팽개친 채
냉정하게 창문을 닫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누워있네요.
그 가책 때문에
갑자기 잠이 달아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장에 손을 대봅니다.
박동소리는 희미하다 못해 뚝뚝 끊어지는 느낌입니다.
답답합니다.

조용히 저에게 묻습니다.

“너, 살아는 있는거니?”

대답은 없습니다.
귀를 기울이니 창문의 울음소리만 들립니다.
그녀, 아직 울고 있는 것일까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벌떡 일어나 젖어있는 창문의 손을 부여 잡고 열어제칩니다.
닫을 때의 장면 그대로를 바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밤바람이 맴돌며 그녀의 울음을 흉내 내고 있을 뿐.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나란히 했을까요?
서로 등을 돌린 채 다시는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길게 그렸을까요?

저는 그 모습 하나 지켜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게요.
내 심장이
내 몸을
내 머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어디 심장용 윤활제 없을까요?

하수구에 트래펑을 붓듯 꿀꺽꿀꺽 삼켜 마시면
식도를 거친 후 위가 아닌 심장으로 바로 들어가
텁텁하게 굳어 있던 좌심방 우심방을 자극시키고
시커멓게 말라 있던 좌심실 우심실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어

굳이 가슴에 손을 대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박동을 언제나 내 귀에 들려주어
그 소리에 밤늦게 까지 잠을 이룰 수 없게끔 하고
이른 새벽녘 알람소리가 되어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
그런 윤활제 말입니다.

내 몸의 피곤과 통장의 잔고액수와 구차한 계산거리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픔을 혈관 가닥가닥에
깊이 담으며 오늘 같은 날엔
두 사람의 마지막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소곤소곤 축복의 기도라도 해주게끔 하는
그런 윤활제 말입니다.

하지만, 없네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전 심장을 두어번 오른 주먹으로 두드리고는
다시 잠을 청합니다.

그런다고 굳은 심장이 눈녹듯 녹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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