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리니 싸늘한 바람 한 결이 몸을 치고 지나갔다. 반팔셔츠 아래 드러난 팔뚝이 잠시 움츠려 들었다. 여름이라고는 하나 아직 완연한 계절의 풍모를 갖추진 못한지라, 한껏 덥기도 하지만 이따금 씩은 춥기도 하다. 변덕스러운 날씨다. 하늘을 보니 비를 양볼 가득 머금고 있는 듯 끄믈끄믈하다. 마음이 다소 급해진다.
두릅계곡은 버스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초행길은 아니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간판들이 낯설지는 않다. 아마 20분 정도 걸으면 계곡 초입에 닿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본 게 아마 2004년쯤이었으니 제법 오래되긴 했다.
같은 방향을 향하는 길동무라곤 스무 발자국 정도 앞에서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걷고 있는 젊은 연인 뿐이다. 몸을 휘감고 있는 태가 다소 불편한 듯 걸을 때마다 네 개의 어깨가 뒤뚱뒤뚱하며 자맥질을 해대는데, 이 우스꽝스런 커플 외에는 인적이 없다. 평일 낮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두릅계곡은 원체 찾는 사람이 없는 편이다. 사실 그것이 오늘 여기를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날 이후, 내 삶은 끝도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굵은 파리 한 마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하루종일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친구들을 만나도 술을 마셔도, 하다 못해 수면제까지 먹어봤지만 뭘 해도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내 생각은 같은 자리를 맴돌 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씩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하는 친구 P는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보라고 권유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조용하고 낯선 장소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자기도 아내와 결별한 이후 여행을 통해 겨우 회복이 되었다고 충고해주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떠오른 곳이 두릅계곡이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한 시간 정도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잘 알려지지 않아 사람도 없으니 P의 말마따나 머리 속의 생각을 바닥에 쏟아 부었다가 하나씩 차분히 쌓아가는 장소로는 더할 나위가 없는 셈이었다. 난 다음 날 바로 길을 나섰다.
버스정류장에서 계곡으로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다. 정류장에서 한참을 올라와 등산로에 접어들었고, 거기서 이삼십 분을 걸어서야 겨우 작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난 샛길로 빠져 언덕 하나를 낑낑거리며 넘어가니 낯설지 않은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4년 만에 찾은 두릅계곡이었다.
상류에서 꼬부라져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바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대한민국 어느 산골짜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계곡이다. 하천은 가장 깊어 보이는 곳이 성인남자의 무릎에도 채 미치지 않으며, 폭도 2미터를 넘지 않을 정도로 소소하다. 여기저기 하얀 살을 햇볕에 드리우고 있는 바위들 역시 다른 계곡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소문 듣고 찾아왔다면 필시 실망할 모습이다. 하지만 물이 있는 호젓한 계곡치고 인적이 무척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이곳의 특별함은 고개 끄덕여줄 만하다. 4년 전에 왔을 때도 이 고즈넉함에 반해 반나절이나 낮잠을 즐기며 지독스레 편안한 시간을 보냈었는데, 아마 그 때의 기억이 뚜렷이 각인되었기에 P의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여기를 떠올린 게 아닌가 싶다.
날씨는 여전히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태세였지만, 어쨌거나 덥지 않아서 좋았고 쪼르륵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정체 모를 벌레들이 자아내는 울음소리가 살갑게 다가와서 마음이 편했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자 가슴 속에 맺혀있던 복잡한 심경이 조금씩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길 잘 했다.
하류 쪽을 바라보니 아까의 그 커플이 벌써 돗자리를 펴놓고 세간을 늘어놓고 있었다. 도시락 통을 꺼내 김밥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게 못내 귀여운 모양새다. 남자가 먹여 준 김밥을 오물거리며 웃음 짓는 여자의 모습에 민경의 모습이 겹쳐졌다. 얼른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자 상류 쪽으로 이동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주위에 널린 조그만 조약돌을 괜스레 발로 짓눌러 보기도 하면서 몇 십 걸음 걸어가니 누움직한 넓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위 위는 덥지 않은 날씨에 살짝 데워진 듯 따뜻했다,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물통을 꺼내 입을 적셨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졸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상태였다. 이제 준비는 다 된 셈이었다.
머리 속을 비우고 싶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던 날 민경은 무딘 나를 위해 차분히 이별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지만 난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화 내내 같은 질문만 반복하는 나를 끝내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더는 납득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머리 속에서 끄집어내 나열해가며, 문장의 순서를 되짚어가며 곱씹어보았으나 단어의 조합은, 문장의 연결은 그저 막막한 괴로움만 자아낼 뿐이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잊으라, 잊으라 합창을 했지만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머리 속은 늘 돌솥에서 끓는 된장찌개처럼 부글거렸고 한 번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하고 심지어 잠도 설칠 지경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프기 시작했다. 머리 전체가 불에 타는 것 같이 뜨거웠다. 병원에 가도, 약을 복용량의 세 배 네 배를 먹어도 두통은 조금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확연하게 몸은 수척해가고 얼굴은 야위어갔다.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생각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생각을 만들어내는 모든 기억들을 깨끗하게 덜어내는 것만이 이 진득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나는 언제부턴가 확신하고 있었다. P의 권유를 통해 겨우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냈을 뿐이다.
난 바위 위에 정좌하여 크게 숨을 들이쉰 후,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잡았다. 왼손은 앞이마를, 오른손은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양 손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난,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돌리지도 못하고 머리는 멈춰 섰다. 힘을 더 주었다. 목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에 힘줄이 빳빳하게 세워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한동안 강하게 저항하던 목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목 뼈에서 부스러기들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민경의 오피스텔에서, 잘 열리지 않는다며 내게 열어달라고 했던 딸기잼 병이 생각났다. 뚜껑은 불량인지 처음에는 꿈쩍도 안 하다가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뻥 하는 소리 함께 겨우 열려 주었다. 민경은 나를 거푸 칭찬해가며 환호했다. 그 환호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 소리를, 그 장면을 머리 속에서 몇 번이나 되감아 보았다. 민경은 열린 뚜껑을 다시 닫는다. 내게 부탁한다. 나는 다시 한참을 씨름한 후 겨우 뚜껑을 여는데 성공한다. 민경은 환호하고는 쨈 병을 받아 뚜껑을 다시 닫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내게 부탁한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몇 분이나 씨름했을까. 그 때의 쨈 병처럼 목에서 뚝 소리가 나며 내 머리는 획 하고 돌아가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니 등이 보였다. 거울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등을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굽어있는 등이 왠지 처연해 보였다. 머리를 더 돌려서 한 바퀴를 채웠다. 머리와 몸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소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연달아 두 바퀴를 더 돌렸다. 처음 돌릴 때만 버거웠지 그 다음은 아주 수월했다. 네 바퀴 째 돌리자 머리의 무게가 온전히 손에 전해져 왔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위로 당겨보았다. 묵직한 무게를 토해내며, 머리가 툭 하며 몸에서 떨어졌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민경은 그 때처럼 환호를 질러줄 것인가.
머리를 조심스럽게 가슴팍으로 들고 와서 살펴보았다. 이상하게도 눈은 내 머리에 붙어 있는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머리였다.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욱하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표정이라니. 이런 얼굴 꼬락서니라니. 못난 놈. 못난 놈. 나는 경멸을 퍼붓다가 얼굴에 침을 뱉었다. 녀석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잊고 싶다. 이 머리 속에 든 모든 것과 작별하고 싶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 담겨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다시 가져가고 싶지 않다.
난 큰 숨을 들이쉬고는 단호하게 머리를 하천에 던져버렸다.
놀라는 표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퍽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금세 위로 떠오르더니 천천히 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둥둥 떠가며 사라져가는 머리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싸늘한 바람 한 결이 드러난 목을 치고 지나갔다. 문득 춥다. 아니, 문득 덥다. 문득 배가 고프다. 아니, 문득 배가 아프다. 문득 잠이 온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문득 구토감이 밀려온다. 문득 덜덜 떨리게 춥다. 문득 녹아 내릴 것처럼 덥다. 문득 기쁘다. 문득 죽고만 싶다.
아까의 샛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데, 등 뒤 멀리서 여자와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저 사람들은? 왜 비명을 지를까?
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걸음을 계속 내디뎠다.
발걸음이 너무나 가볍다.
두릅계곡은 버스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초행길은 아니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간판들이 낯설지는 않다. 아마 20분 정도 걸으면 계곡 초입에 닿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본 게 아마 2004년쯤이었으니 제법 오래되긴 했다.
같은 방향을 향하는 길동무라곤 스무 발자국 정도 앞에서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걷고 있는 젊은 연인 뿐이다. 몸을 휘감고 있는 태가 다소 불편한 듯 걸을 때마다 네 개의 어깨가 뒤뚱뒤뚱하며 자맥질을 해대는데, 이 우스꽝스런 커플 외에는 인적이 없다. 평일 낮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두릅계곡은 원체 찾는 사람이 없는 편이다. 사실 그것이 오늘 여기를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날 이후, 내 삶은 끝도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굵은 파리 한 마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하루종일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친구들을 만나도 술을 마셔도, 하다 못해 수면제까지 먹어봤지만 뭘 해도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내 생각은 같은 자리를 맴돌 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씩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하는 친구 P는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보라고 권유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조용하고 낯선 장소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자기도 아내와 결별한 이후 여행을 통해 겨우 회복이 되었다고 충고해주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떠오른 곳이 두릅계곡이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한 시간 정도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잘 알려지지 않아 사람도 없으니 P의 말마따나 머리 속의 생각을 바닥에 쏟아 부었다가 하나씩 차분히 쌓아가는 장소로는 더할 나위가 없는 셈이었다. 난 다음 날 바로 길을 나섰다.
버스정류장에서 계곡으로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다. 정류장에서 한참을 올라와 등산로에 접어들었고, 거기서 이삼십 분을 걸어서야 겨우 작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난 샛길로 빠져 언덕 하나를 낑낑거리며 넘어가니 낯설지 않은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4년 만에 찾은 두릅계곡이었다.
상류에서 꼬부라져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바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대한민국 어느 산골짜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계곡이다. 하천은 가장 깊어 보이는 곳이 성인남자의 무릎에도 채 미치지 않으며, 폭도 2미터를 넘지 않을 정도로 소소하다. 여기저기 하얀 살을 햇볕에 드리우고 있는 바위들 역시 다른 계곡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소문 듣고 찾아왔다면 필시 실망할 모습이다. 하지만 물이 있는 호젓한 계곡치고 인적이 무척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이곳의 특별함은 고개 끄덕여줄 만하다. 4년 전에 왔을 때도 이 고즈넉함에 반해 반나절이나 낮잠을 즐기며 지독스레 편안한 시간을 보냈었는데, 아마 그 때의 기억이 뚜렷이 각인되었기에 P의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여기를 떠올린 게 아닌가 싶다.
날씨는 여전히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태세였지만, 어쨌거나 덥지 않아서 좋았고 쪼르륵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정체 모를 벌레들이 자아내는 울음소리가 살갑게 다가와서 마음이 편했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자 가슴 속에 맺혀있던 복잡한 심경이 조금씩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길 잘 했다.
하류 쪽을 바라보니 아까의 그 커플이 벌써 돗자리를 펴놓고 세간을 늘어놓고 있었다. 도시락 통을 꺼내 김밥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게 못내 귀여운 모양새다. 남자가 먹여 준 김밥을 오물거리며 웃음 짓는 여자의 모습에 민경의 모습이 겹쳐졌다. 얼른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자 상류 쪽으로 이동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주위에 널린 조그만 조약돌을 괜스레 발로 짓눌러 보기도 하면서 몇 십 걸음 걸어가니 누움직한 넓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위 위는 덥지 않은 날씨에 살짝 데워진 듯 따뜻했다,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물통을 꺼내 입을 적셨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졸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상태였다. 이제 준비는 다 된 셈이었다.
머리 속을 비우고 싶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던 날 민경은 무딘 나를 위해 차분히 이별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지만 난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화 내내 같은 질문만 반복하는 나를 끝내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더는 납득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머리 속에서 끄집어내 나열해가며, 문장의 순서를 되짚어가며 곱씹어보았으나 단어의 조합은, 문장의 연결은 그저 막막한 괴로움만 자아낼 뿐이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잊으라, 잊으라 합창을 했지만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머리 속은 늘 돌솥에서 끓는 된장찌개처럼 부글거렸고 한 번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하고 심지어 잠도 설칠 지경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프기 시작했다. 머리 전체가 불에 타는 것 같이 뜨거웠다. 병원에 가도, 약을 복용량의 세 배 네 배를 먹어도 두통은 조금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확연하게 몸은 수척해가고 얼굴은 야위어갔다.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생각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생각을 만들어내는 모든 기억들을 깨끗하게 덜어내는 것만이 이 진득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나는 언제부턴가 확신하고 있었다. P의 권유를 통해 겨우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냈을 뿐이다.
난 바위 위에 정좌하여 크게 숨을 들이쉰 후,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잡았다. 왼손은 앞이마를, 오른손은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양 손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난,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돌리지도 못하고 머리는 멈춰 섰다. 힘을 더 주었다. 목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에 힘줄이 빳빳하게 세워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한동안 강하게 저항하던 목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목 뼈에서 부스러기들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민경의 오피스텔에서, 잘 열리지 않는다며 내게 열어달라고 했던 딸기잼 병이 생각났다. 뚜껑은 불량인지 처음에는 꿈쩍도 안 하다가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뻥 하는 소리 함께 겨우 열려 주었다. 민경은 나를 거푸 칭찬해가며 환호했다. 그 환호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 소리를, 그 장면을 머리 속에서 몇 번이나 되감아 보았다. 민경은 열린 뚜껑을 다시 닫는다. 내게 부탁한다. 나는 다시 한참을 씨름한 후 겨우 뚜껑을 여는데 성공한다. 민경은 환호하고는 쨈 병을 받아 뚜껑을 다시 닫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내게 부탁한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몇 분이나 씨름했을까. 그 때의 쨈 병처럼 목에서 뚝 소리가 나며 내 머리는 획 하고 돌아가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니 등이 보였다. 거울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등을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굽어있는 등이 왠지 처연해 보였다. 머리를 더 돌려서 한 바퀴를 채웠다. 머리와 몸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소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연달아 두 바퀴를 더 돌렸다. 처음 돌릴 때만 버거웠지 그 다음은 아주 수월했다. 네 바퀴 째 돌리자 머리의 무게가 온전히 손에 전해져 왔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위로 당겨보았다. 묵직한 무게를 토해내며, 머리가 툭 하며 몸에서 떨어졌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민경은 그 때처럼 환호를 질러줄 것인가.
머리를 조심스럽게 가슴팍으로 들고 와서 살펴보았다. 이상하게도 눈은 내 머리에 붙어 있는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머리였다.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욱하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표정이라니. 이런 얼굴 꼬락서니라니. 못난 놈. 못난 놈. 나는 경멸을 퍼붓다가 얼굴에 침을 뱉었다. 녀석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잊고 싶다. 이 머리 속에 든 모든 것과 작별하고 싶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 담겨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다시 가져가고 싶지 않다.
난 큰 숨을 들이쉬고는 단호하게 머리를 하천에 던져버렸다.
놀라는 표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퍽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금세 위로 떠오르더니 천천히 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둥둥 떠가며 사라져가는 머리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싸늘한 바람 한 결이 드러난 목을 치고 지나갔다. 문득 춥다. 아니, 문득 덥다. 문득 배가 고프다. 아니, 문득 배가 아프다. 문득 잠이 온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문득 구토감이 밀려온다. 문득 덜덜 떨리게 춥다. 문득 녹아 내릴 것처럼 덥다. 문득 기쁘다. 문득 죽고만 싶다.
아까의 샛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데, 등 뒤 멀리서 여자와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저 사람들은? 왜 비명을 지를까?
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걸음을 계속 내디뎠다.
발걸음이 너무나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