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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M군 스토리

문★성 2007.06.25 20:30 조회 수 : 262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방안으로 쏟아지듯이 들어온다.
M군이다. 오늘도 야근을 한 모양이다.

M군은 현관의 약한 백열등 빛에 의지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익숙해진 벽을 더듬어 방의 조명을 깨운다. 조용히 잠들어있던 방을 깨운다.

오늘도 쉽지 않았던 하루.
싸움 따위 당연히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동안 진흙탕 속에 사투라도 벌인 듯 몸이 나른하고 고되다.

그러나 오늘만은, 적어도 오늘만은 여느 날처럼 쓰러져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6월 25일. 이날은 M군이 고향별과 정기통신을 하는 날이다.

M군은 냉장고를 열어 얼마남지 않은 물통의 물을 깡그리 목에 쏟아부은 후
책상 앞에 앉는다. 중요한 날이니만큼 괜시리 긴장되는 기분이다.
M군은 불안한 눈초리로 좌우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기 시작한다.
혹시 누가 보고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아무도 볼 리 없다.

책상 위에는 고향별을 떠나기 전 우주비행장에서 찍은 사진이 놓여져있다.
양손에 환한 꽃다발을 들고 그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M군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약 3명(경찰추산)에 달하는 환송인파의 물결이 얼핏 보여진다.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는 풍경, 어느새 그윽한 향수에 취한
M군은 의자에 기대 지긋이 눈을 감는다.
고향별에서의 기억이 대장에서 십이지장을 거쳐 식도까지 역류해옴을 느낀다.

그렇다.
지금은 비록 평범한 지구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고향별에서의 M군은 촉망받는 인재, 그야말로 장상지재였다.
그는 구구단을 무려 스물 두 살 때 한치의 틀림도 없이 완벽히 마스터함으로써
지역신문 사회란에까지 회자된 적이 있으며
중학교 3학년 영어교과서를 무려 중학교 2학년 때 예습함으로써 학교의 영재로 추앙되기도 했다.
한동안 고향별에 불었던 조기교육열풍의 원흉으로 지탄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장학퀴즈 대회에서 태양계 행성의 순서를 묻는 최후의 문제를
아쉽게 틀려버려 장원을 따내지 못한 것이 단 하나의 오점이랄까.
정답은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당시 M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태종태세문단세'라고 말했다.


하지만 M군은 지구별에 온 후 스스로의 총명함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낀다.
지구별의 좋지않은 환경 때문이다.
프탈레이트 가소제, 포름알데히드 등의 각종 독성물질들이
M군이 입을 뻥끗 벌릴 때마다  
목욕탕 하수구에 물 빨려 들어가듯 삽시간에 침투,
온몸의 세포가 초절정순수희귀 성분인 '니코틴'으로 구성되어
면역력이 한 떨기 국화꽃처럼 약한 M군을 좌삼우삼 흔들어버린 것이다.
뇌세포가 손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M군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금 그는 충분히 행복하다.
M군은 조용히 일어서서 옷장 서랍을 열어젖힌다. 속옷을 두는 서랍장이다.
그 곳에는 비싼 돈 주고 산 후 사이즈가 안 맞아 잘 안 입게 된 '스키니 빤스'들이 있다.
녀석들은 M군을 볼 때마다 다음과 같이 껄렁한 말투로 협박을 일삼곤 한다.  

- 여어. 형씨. 우리 언제쯤 입어줄거야. 언제까지 저런 촌스런 사각팬티나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헐렁한 삼각팬티 녀석들하고 어울려 젊은 날을 날려버릴거냐고.    
   컴온 베이비. 인생은 짧은거라고. 다시 한번 하복부 압박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보자고, 유남생?

미안하지만 M군은 빤스가 하는 말 따위 잘 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서랍장을 한참을 뒤적이다가 마침내 구석에서 주먹만한 물건 하나를 꺼낸다.
납작한 검은색의 물건, 마치 조약돌 같은 모양새다.
고향별과의 통신장비이다.

M군은 이 물건을 책상 위에 놓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지작거리고
얼마 되지 않아 통신장비는 환한 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연결이 된 것이다.

스피커도 없지만 돌모양의 장비는 맑고 쾌청한 음량으로 상대방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        M군인가?

-        예… M입니다. M234-SXX-U22-NG2입니다

-        굳이 풀네임을 말한 필요는 없네. 모르는 것도 아니니

-        예… 그렇군요. 다들, 잘 지내시죠?

-        아. 뭐 그렇다네. 자네는 어떤가?

-        여전히 바쁘죠. 뭐. 회사에서 신제품이 출시가 되었는데 또 제가 그걸 담당하게 되어서 요즘은 조금 더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그나마 예전보다는 좀 낫습니다. 일도 제법 손에 익은 것 같구요. 뭐. 처음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지구인으로서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거 아닐까요?

-        아. 그것, 다행이구만. 그래도 일은 많지?

-        예. 여전히 일은 많아요. 삶의 여유도 별로 없구요.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건지. 쳇. 덕분에 저도 따라서 정신없이 살게 되는거 있죠.

-        음...

-        참 작년부터 넣기 시작한 주식형 펀드가 요즘 수익률이 좋아요. 20%가 넘었답니다. 물론 요즘 증시가 하도 좋다 보니 직접투자 하는 사람들은 떼돈을 번 것 같던데요. 그래도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그것 참 잘 된 일이구만.

-        예. 적금도 여름에 만기되니 이걸로 직접투자도 배워볼까 생각 중입니다. 결혼하고 살림 차리려면 몇 년 동안 열심히 저축도 해야 되고 벌기도 많이 벌어야 할 것 같아요. 헤헤.

-        .. 음.

-        뭐 도와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향별에 손 벌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 잘 아시잖아요.  

-        …

-        예.. 그리고 또 보고 드릴게.. 아, 참. 7월말에 여름휴가가 있습니다. 친구들과 놀러갈지, 여행을 갈지, 아니면 집에서 공부를 할지 아직은 결정을 못했어요. 특별히 할 일이 정해진 것은 아닌데, 그래도 또 기분은 좋습니다. 휴가잖아요.

-        …

-        듣고 계세요? 오늘은 지난 보고 때보다 조용하시네요? 지난번에는 세세히 보고 드리지 않는다고 꾸중하셨지 않습니까?

-        그래.. 그랬지…

-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        …M군.

-        예.

-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        …

-        자네. 이제 돌아와야겠네.

-        ..예?.. 도.. 돌아오라뇨? 갑자기 .. 왜..

-        그렇게 되었네. 고향별의 방침일세

고향별의 방침이라면 거역할 수 없다. M군은 잘 알고 있다

-        7월 1일이야. 그 날 자네를 태우러 갈 것일세

-        .. 아, 아니 그렇게.. 그렇게 빨리요?

-        고향별의 방침일세. 자세한 이유는 돌아오면 말해주겠네.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하네만, 남은 날 동안 주변 일들을 깨끗하게 정리해놓으시게

-        … 정말 너무하십니다. 이렇게 갑자기 그러시면..

-        알잖은가. 통보를 하고 소환하는 것도 우리로서는 큰 배려일세

-        …

-        말 한마디 안하고 소환되는 청년들도 부지기수일세. 자네는 그 동안의 평가가 매우 좋았기에 이별의 시간을 허락해주는 것뿐. 오히려 고향별의 배려에 감사해야 할 것일세

-        …예. ...

-        그럼. 7월 1일 오전 8시 자네가 처음 지구별에 내린 그 곳에서 기다리게.

-        ...

-        좋아. 자네는 고향별의 기대주. 지구별에 평생 머무르게 할 수는 없지. 그럼 돌아와서 보세나

-        …예

뚝.
어느새 조약돌 모양의 통신기기는 빛을 잃어있다. 연결은 끊어졌다.
퇴근할 때부터 지쳐서 기운이 없던 M군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남아있던 기운마저 진공청소기로 빨아당겨진 기분이다.
고향별의 지침은 절대적이다. 본인이 부정하든, 저항하든, 맞서 싸우든
일주일 뒤면 그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허무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본다.
방안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것들은 손쉽게, 어떤 것들은 정말 어렵게 구하였고
어떤 것들은 즐거운 추억이, 어떤 것들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크고 작은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들이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무심결에 들고 통화목록과 전화번호부를 확인한다.
많은 이름, 이름들.
이 한 사람 한 사람과 얼마나 많은 얘기를 했고 얼마나 많은 얘기를 만들어왔던가.
M군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주위의 모든 것들, 모든 사람들과 안녕을 고해야 한다.
알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지구별에 올 때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 아닌가.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왜 그것을 잊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을까
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히고 살았을까
왜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고 계산에 계산을 거듭해야 했을까
후회와 아쉬움이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끝이다.
M군은 내일 회사 가서 사직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침대 위에 쓰러진다.

잠이 쏟아진다.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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