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인생은 KTX 인생.
서울에서 대구까지 99분에 달려야해.
중간에 '운전정비관계'로 '서행' 및 '연착'하는 것은 원치않아.
전기를 미친듯 우걱우걱 집어삼키며 달려, 달려야 돼
가끔은 무궁화호 인생쯤 되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이미 기차는 출발했고 정차는 없으니
그저 달려, 달려야해.
(동대구역 5번 승강장 기둥에 누군가 볼펜으로 적어놓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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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이란 드라마의 마지막회를 봤다.
주인공 장준혁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사람들의 소감에 우선은 공감하였지만
것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정열적으로 일하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무아지경에 빠지는 모습에 가슴 뜨거워짐을 느꼈다.
저건 정말 멋있다. 과연 나는 죽을 때, 혹은 죽음을 앞두고 저 사람처럼 일에 대한 사랑,
열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글쎄. 지금으로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꼭 그래야한다는 의무감도 들지 않는다.
같잖은 변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먼저 내 일이 저러한 ‘전문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메스를 들고 집도하는 자신을 꿈꾸어보는 장준혁은 멋있었지만
죽음을 앞두고 파워포인트 발표자료 34번째 장을 만드는 나를 꿈꾸는건 별로 폼이 안 나거든.
아쉽지만 저런 멋짐은 내 인생 다른 줄기에서 찾아야 하겠지.
그러고 보면 말이다. 나도 메스를 들고 수술이라는 연주에 지휘를 하며 살 수도 있었다.
9년전 의대진학을 택했다면 말이다.
당시에는 ‘피보는게 싫다’라는 등의 유치한 이유를 둘러대며 굳이 공대를 고집했지만
사실 열아홉살의 이유가 논리적이거나 앞을 훤히 내다보는 수준도 아니고
공학에 큰 뜻을 품은 것도 아니었으니 어떠한 외부적인 압박, 압력이 있었다면,
혹은 내 생각을 바꾸게 될 간단한 계기만 있었더라도 간단히 그 때의 선택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공여부, 적성부합여부와 관계없이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내 모습은 물론이고
20년, 30년 뒤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뒤바뀌었겠지.
아마 내 일, 주위 사람, 거주지, 취미생활, 건강, 심지어 외모, 성격까지 지금과는 딴판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녀석에게, 혹은 그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닐 그 주위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도록 맡겨버리는 것은 인생의 참 잔인한 면면이겠지만 현실은 분명히 그러하다.
기억을 조금 앞으로 감아 2년전, 유한킴벌리로 방향을 급선회하지 않고 다른 회사로 갔다면 어땠을까?
회사에서 내게 준 ‘생각해보세요’의 두 시간 동안, 그 때는 발생하지 않은 어떠한 계기가 있었더라면 역시 간단히 그 때의 결정 또한 바뀌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9년 전만큼의 파괴력은 아니더라도 내 삶은 지금과는 크게 다르게 뻗어왔을 것이며
적어도 지금처럼 대전에서 컴퓨터 두드리고 있지는 않을테지.
이렇듯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고 형태가 잡혀간다.
어릴적이야 자신이 아닌 부모님에 의해 인생이 하나 둘 결정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
서서히 비중은 바뀌게 되고 그 하나하나의 결과가 긴 시간에 걸쳐 연결되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기워낸다.
뚜렷한 모범답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디아나 존스나 제임스 본드처럼 두 개의 잔 중에서 독배를 마시면 즉사한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일은 사실 없기에 결국 여러 갈래 길 중 어느 쪽 길로 가느냐는 문제인데,
인생이란 목적지에 닿는게 전부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도 볼 수 있고
그 목적지라는 것도 종래는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맞았다 틀렸다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장준혁은 아니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성취감을 느끼고 여러 일에 도전해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란 가히 어렵지만은 않다.
다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러한 선택의 기회가 자꾸만 감소하는 것 같아 아쉽다.
아니 아쉬움을 넘어 슬프다. 슬프다.
예전에 세상은 내게 쉴새 없이 문제를 냈다.
갈림길은 자주 등장했고 선택지도 어떤 때는 10개가 넘을 정도로 많고 다양했으며
각각의 파급력 또한 인생 전체를 판가름할 정도로 강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갈림길의 회수와 선택지의 수, 그 위력 모두 줄어든 느낌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내 삶은 내게 회사를 다닐거야 말거야 한달에 한두 번씩은 물어보던데
이제는 그런 물음도 뜸하다.
다시 말해볼까.
먹고 살아야하는 생존을 위한 생활에 익숙해지면, 결혼하게 되면, 자식을 가지게 되면,
그 자식들을 책임져 키워가게 되면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더 줄 것이다.
가끔씩 선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옵션은 지금처럼 사지선다 형식이 아닌
Yes/No의 양자택일이거나 답이 뻔히 정해진 단답형 주관식 수준에 머물 것이며,
그 여파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볼까.
인터넷이나 게임 등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선택을 요구하는 화면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애초부터 클릭이 불가능한 옵션이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보기는 있으되 선택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중후반부로 넘어가면 갈림의 순간에 고를 수 있는 것이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가족의 시선, 생활의 압박, 주위와의 비교 등이 손을 잡아매어 누구나 고를 수밖에 없는 역시나의 답안을 고르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부르셨습니까”
“응 문부장. 당신한테 말하기 좀 미안한 일인데”
“예..”
“이번에 회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것 같아. 대충 알고 있지?”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미안하네.”
“예??”
“아쉽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네. 시간은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지금부터 준비해두게나.”
“…”
“나가보게. 옆자리 박부장도 좀 불러주고”
짜짜짠.
다음 중 적합한 답을 ‘선택’하여 체크하세요.
단, 개중에는 체크를 아예 할 수 없는 보기도 있답니다.
1. □ 사장님의 멱살을 틀어쥐고는 내가 너한테 해준게 어딘데 이러느냐고 윽박지른다
2. □ 피식 웃으며 안그래도 부르는데가 열 일곱군데인데 먼저 말할 부담을 덜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3. □ 사장님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가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데 나는 어떡하냐고 꺼이꺼이 울며 빈다.
4. □ 한숨을 땅에 꺼지라 쉬며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며 가족에게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한다
썼던 형용사 반복해서 쓰는 것은 내 어휘력의 빈곤을 내 손으로 드러내는 꼴이지만
인생은 잔인하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달변으로 인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결코 늦지 않았다
밝게 말한다 하더라도 글쎄다. 앞에서 말해온 것처럼 지금부터 다가올 선택들은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형태임이 분명하고 또한 결정적으로 우린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이미’ 거쳐와버리고 말았다.
역전승을 노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인지도.
그렇기 때문에 난 약간의 조급함을 느낀다.
이제는 마냥 앉아서 그런 시기가 오는 것을 기다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선택의 순간이 자꾸 줄어드는 것도, 그 때마다 수동적으로 어떠한 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끔찍하다.
이대로라면 내 인생, 갈림길 없이 그저 쭉 뻗은 보통의 길 하나밖에 눈앞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평범한 길일 것이며 거기에도 행복은 넘쳐날 것이나
어떤 불운 같은 것이 닥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조마조마한 길일 것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필연코 그 길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선택의 순간을 스스로 만들고 선택지를 스스로 늘여나가는 것이다.
어떠한 극적인 선택의 순간은 아니더라도
TV와 인터넷을 즐기는 대신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바로 할 수 있는 작은 선택의 행동들을 함으로써 조금의 변화라도 미리 만들어가자는 말이다.
하나의 길밖에 보이지 않는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도 그건 그렇게 보이는 것일뿐.
선택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온전히 나의 의지로 결정되는게 아닐런지.
건강하고 체력이 넘친다면 수풀을 헤쳐서라도 새로운 갈림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밝고 지혜롭다면 남들은 미처 보지 못하는 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생각이 젊고 창의가 살아 숨쉰다면 땅을 파거나 바다를 통하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고개숙인 인생이 아니라 높이 하늘을 바라보는 삶이라면 공중에 떠있는 무지개를 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길은 아마 모두가 부러워하고 놀랄만한 멋진 인생길일테지.
마지막으로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갈림의 순간은 내게 끝도 없이 나타날 것이며
그 모든 선택들의 종착은 ‘행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서게 될 나는,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결코 초라해보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동대구역은 뻥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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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혁
2007.03.1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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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
2007.03.19 07:31
응 글 올릴 때 문자로 연락가는 것도 아닐텐데 고마우이. 조만간 찾아서 밥으로 인사드리겠네. ^-^;
문사장님은 대선후보로 거론은 되지만 '유력'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찌될지는 정말 모르겠고 내가 89년생인건 실로 그러하다네. 형님. -
wonjo
2007.03.26 13:13
89년생들은 삼촌이라고 부른다네..ㅋㅋ
아직 선택의 기회가 있구만 89년생 이면..
삶을 너무 빨리 달려오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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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
2007.03.27 12:31
그래 나이도 어리니, 구국의 결단을 내려
확 한국을 떠버릴까? ^-^
유킴사장님은 유력대선후보로도 거론되시던데, 자네 이참에 사장님참모로 뛰어보는건 어떤지? ㅋㅋ
아 글고 자네 프로필을 보고 알았네만, 89년생이었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