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12일]
어제 온 메일의 답장은 이리저리 고쳐보다가 결국 보내지 못했다.
첫줄은 썼다.
'안녕하세요... 메일 잘 봤습니다'
딱 여기까지만.
그 후 삼십분넘게 컴퓨터 앞에 멍하게 앉아있다가 결국 관둬버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말주변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몰라서?
얼굴 맞대는 것이 겁나서? 글쎄다.
답장은 못 썼는데 그래도 그 메일 속 여자에 대한 생각은 계속 났다.
얼굴이 예쁘지않을까하는 기대도 조금 들었는데
검은색 눈물과 함께 입에서 검은 액체를 줄줄 흘려대는
흙빛의 얼굴을 한 여자를 생각하니 손사래가 절로 쳐졌다.
오후에 네이버까페에 들어가봤는데 그녀는 따로 글을 남기지는 않은 듯했다.
요 며칠 빛을 잃은 신입도 보이지 않았고 새로운 소식도 없었다.
빛을 잃지 않은 세상은 물론이고 빛을 잃은 세상마저도
내가 어떻게 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잔잔하게 흘러갈 뿐이다.
섭섭한 기분이 든다.
밤열두시가 다 되어 미정이의 문자가 왔다. 괜찮냐고.
답문은 보내지 않았다.
[2006년 12월 13일]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았다.
아니, 분명 잠에서 깨어 눈은 떴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다 의자에 부딪혀 아프게 넘어지니 실감이 났다.
어둠 뿐이었다. 한 줄의 빛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한참 뒤에 시력은 돌아와주었다. 아마 가늠도 못할 긴 시간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잠에서 깨어날 때 시력이 제 때 돌아오지 않은 것이고,
분명 이 역시 빛을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렸다.
왜인지 내일은 더 심해질 것만 같다.
더 안 좋아지다가 나중엔 기어코 눈을 뜨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고
그게 당장 내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방의 풍경이 짧은 내 생에서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드니 늦은 밤이 되었지만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다.
아무 논리도, 근거도 없는 걱정이지만
이를 제어할만한 논리와 근거 또한 나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함은 하루종일 날 집요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물어뜯고 있다.
시력을 잃는 것은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징조일뿐,
빛을 잃은 나는 그 댓가로 모든 것을 잃어갈것만 같다.
하나씩 하나씩.
혹은
한순간에 모두.
무섭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 고통을 할아버지나 다른 이에게 넘겨주고서 내가 괜찮아진다면
그것만큼 이기적인 것은 없을테다.
[2006년 12월 14일]
눈은 떠졌다.
물론 처음 깨어났을 때는 어제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다시 볼수는 있을까하는 걱정에 한동안 이불을 덮어쓰고 오돌오돌 떨기까지 했는데
감격스럽게도 시력은 조금씩 조금씩 돌아와주었다.
혹시나해서 깨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주섬주섬 더듬어찾아 사진 촬영 버튼을 눌렀었고,
시력이 돌아온 후 사진이 찍힌 시간을 확인해보았는데 한 12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지만 막상 느끼기엔 두세시간은 족히 된 것 같았는데 그나마 한숨 놓았다.
내일도 시간을 확인해본다면 대충 흐름을 잡아볼 수 있겠지.
물론 오늘은 12분이었지만 내일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자. 그래야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조금 덜 절망할 수 있고
그보다 나은 일이 생기면 그나마의 희망을 우겨삼킬 수 있으니까.
까페에 가봤더니 신입이 어제 등장한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이 사람 역시 빛을 깡그리 잃은 사람이다. 나를 포함하여 세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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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도 빛을 잃었습니다..
내용:
친구한테 듣고 찾아왔습니다.
딴에는 같이 빛을 잃은 분들을 만나 위로받고자 하는 바람이었는데,
여기 저처럼 빛씨를 남김없이 잃은 분은 거의 안 계신 모양이네요.
저는 빛을 잃은지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제법 오래되었고 진단결과 빛씨가 깨끗히 동이난 상태입니다.
상태가 안 좋죠. 좀 많이 안 좋아요.
그래도 아직까지 키보드는 두드릴 수 있는 상태니까,
뭐 묻고 싶은 것 있으면 댓글이나 쪽지주세요.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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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은지 한 달.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저 때까지도 시력은 살아있고 목숨도 살아있구나.
좀 불편해도 제 수명은 다할 수 있을 것 같아 왠지 주먹이 불끈 힘이 들어갔는데
그래도 아랫쪽 '상태가 좀 많이 안 좋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나 안 좋길래.
하지만 따로 연락해서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내 몸이 차츰 죽어가는 모습을 굳이 날짜별, 단계별로 자세히 설명 들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저 한달이 지나도 저렇게 살아있을 수 있다는 점에 안도할 뿐이다.
밤열두시가 다 되어 미정이의 문자가 왔다. 왜 답이 없냐고.
고민했다. 그러나 답문은 보내지 않았다.
[2006년 12월 15일]
아침, 시력이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18분이었다.
어제와 똑같거나 내심 더 줄어들기를 기대했으나 6분 추가 정도면 그리 나쁜 정도까지는 아니다.
점심이 되어 할아버지가 가져다주신 숭어조림을 냉장고에서 꺼내 살짝 데워먹었는데
몇 숟갈 채 뜨지 못한고 심한 구토감에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시커먼 오물을 뱉고 또 뱉었다.
변기를 끌어안듯 붙잡은채 끝이 없는 것 같은 무한의 구토가 온몸의 장기를 뽑아낼 기세로 지속되었다.
어제보다도 한층 심해진 기분, 방으로 돌아오니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이러다가 내가 며칠이나 더 살 수 있을까.
갑자기 메일의 그녀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나와 같은 날 빛을 깡그리 잃었고 증세도 나와 똑같이 진행되는 듯했다.
분명 그저께쯤 시력을 일순 잃기 시작했을 것이며 막강한 구토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나마 건장한 남자이고, 그녀 또한 몸무게 80kg이상의 건장한 여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괴로움의 정도는 나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심할 것이다.
그 메일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루종일 눈물만 흘렸다잖은가.
난 검은색으로 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메일함을 다시 열어 답장버튼을 눌렀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길게 쓰지 않았다.
"전화주세요. 제 번호는 011-503-2650입니다"
[2006년 12월 16일]
16분. 어제보다 오히려 조금 짧았다.
게다가 오늘은 구토감도 들지 않고 전반적인 몸상태도 어제보다 좋았으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젯밤에 전화는 오지 않았다. 너무 늦게 메일을 보낸탓일까.
데이트 신청한 것도 아니니 괜히 마음 졸일 필요없는데도 신경은 계속 쓰였다.
밤이 깊어갈 무렵.
드디어 메일의 그녀 - 이름은 J라고 했다 - 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쁘고 수줍은 목소리였다. 왠지 두근거렸다.
먼저 몸상태를 물어보니 역시 지금 내 경우와 똑같은 듯했다.
많이 힘드냐는 질문엔 견딜만하다고 애써 웃는 귀여움도 내비쳤고
아직 학생이라니 나보다는 조금 어린 듯도 했다.
그녀는 벌써 까페에 글을 올린, S라는 사람과도
연락을 했다고 하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갔다.
우리 세명이 만난다고 지푸라기가 통나무처럼 굵어지지는 않을테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내일 만나기로 이미 약속을 잡았다고 해서 나도 같이 끼기로 했다.
한달만큼 더 죽어간 내 모습을 마주하기는 꺼림직하지만
그녀의 애닳음과 다급함이 왠지 안 되어 보였고
나역시 그가 궁금한 건 사실이니까. 아무 대책없이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물론 답은 쉽게 안 나오겠지만 말이다.
통화를 끊은 후 미정이 생각이 났다.
허나 연락하지는 않았다. 동정받기는 싫다.
[2006년 12월 17일]
무려 42분. 어제 너무 안심한 탓일까.
쉽사리 시력이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충격은 컸고 그 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어떠한 패턴같은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날 무엇을 했는가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S가 아직 시력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다.
약속은 오후 세시.
한 시반쯤 되어 슬슬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예요...."
"예! 안 그래도 막 지금 나가려는 참이었어요"
"저기... S씨 있잖아요. 오늘 만나기로 한..."
"예"
"그.... 으... 그 분이요... ..죽었대요. 어젯밤에... 약속 확인해보려 전화한 건데... 간밤에. 그리 됐다고..."
"예?"
"사고 같은 건 아니구요.. 빛을 잃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던 그 사람이 결국 빛을 잃은지 한달 만에 죽었다.
한동안 멍해진채 말을 잇지 못했고 계속 흐느끼는 마음약한 그녀를 겨우 달래고서는 전화를 끊었다.
만나는 것은 조금 미루기로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빛씨가 모두 사라진 빛을 잃은 사람은 세명.
일주일 정도 된 나와 J, 그리고 한달이 된 S.
그리고 S가 죽었다. 자세한 것은 알아봐야겠지만
빛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며칠 전 처음 알게 되었을 뿐인 그의 죽음이
그 어떤 가까운 지인의 죽음보다 더 싸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죽음이 머지않아 내게도 다가올 동질의 녀석이기 때문이다.
모든게 무서워지고 모든게 두려워졌다.
정말 나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일까.
정말. 나도 죽게 되는 것일까..
(세번째 이야기에 계속...)
기대해 마지 않았던 2편..
3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 슬램덩크 연재담당 같은 센스쟁이같으니.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