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9일]
오늘, 난 빛을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빛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밤새 자면서 침대 밑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새벽에 부엌에 물 마시러 갈 때 두고 온 것은 아닌지
찾아보았지만
빛은 없었다.
춘천에 계신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빛을 잃었다고 하니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빛을 잃었구나"
"예, 할아버지"
"일단 병원에 가봐라. 용한 의원을 알고 있다"
"예, 할아버지"
병원에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빛을 잃었다고 운전을 못한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접수대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빛을 잃으셨군요!"
"..."
병원안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빛을 잃은 환자가 그리 자주 오지는 않는가보다.
하기는 내 주위에 빛을 잃은 사람도 지금까지 두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한 병은 절대로 아니다.
앞서와서 기다리던 환자가 여럿 앉아있었지만 먼저 진료실로 안내되었다. 특별대우인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안 됐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볼 뿐
새치기에 대해 분함을 느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진료실을 들어갈 때 아주머니들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혀왔다.
왜 아주머니들은 늘 들으라는듯이 저렇게 얘기하는 걸까. 젠장.
주름 가득한 얼굴의 의사는
내 눈을 라이트로 몇 번 비추어보고
청진기로 배 여기저기를 짚어보더니
할아버지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오늘 아침부터요"
"어젯밤 특별한 일은 없었겠구요?"
"예. 뭐 그렇죠. 학교 다녀와서 티비 좀 보다 그냥 잤는걸요."
"음"
"선생님, 상태가 좀 어떤가요?"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아주 안 좋습니다. 빛씨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아.. 그렇다면..."
"글쎄요. 일단 보충은 조금 해드리겠습니다만 충분하지 못할 것이고,
며칠 가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 처방도 통할지 모르겠네요."
주사 한 대 맞고 처방전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나보고 소리친 간호사가 주기적으로 벌떡 일어서며 외치고 있었다.
"위궤양으로 삼년 오개월 동안 고생하고 계시군요!"
"똑바로 누워잘 수도 없는 살인적 악성치질이 있으시군요!"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냄새 풀풀 나는 마흔세살의 노총각이시군요!"
눈에 MRI라도 박았나. 보통 간호사가 아니구나.
약을 먹어도 빛이 돌아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미정이한테 전화를 걸어서 빛을 잃었다고 하니
한참 울다가 위로했다가 걱정했다가 그렇게 정신없이 통화한 후
두시간 사십분 뒤에 문자가 왔다
<미안,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 솔직히 조금 무서워>
이해할 수 있다. 나라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할아버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병원에 다녀와도 별 소용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한숨만 쉬셨다. 죄송해요. 가족이라곤 나밖에 없는데.
[2006년 12월 10일]
병원에 가니 의사는 자신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와 학교로 갔다.
과사무실에 가서 빛을 잃었다고 하니 휴학계를 쓰라고 내밀었다. 강제였다.
휴학사유란에는 유학, 입대, 취직 등 여닐곱개의 체크박스가 있었는데
사무실 아가씨가 내뜸 '심각한 질병'에 체크해주었다.
네이버 까페를 뒤지다가 '빛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회원 수가 한 만 명쯤 되는데 실제적으로 빛을 잃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가입했고 인사글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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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녕하세요! 신입입니다.
아이디: 눈빛은살아서
내용:
안녕하세요.
오늘 새로 가입했습니다.
빛을 잃은지는 한 이틀 되었구요
을지로2가에 있는 ○○병원에 갔는데 빛씨는 거의 남겨진게 없고
치료도 힘들다고 해서 참 암울한 상황입니다. ㅜㅁㅜ
암튼 좋은 정보 많이 얻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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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후 세 시간 오십 분 뒤에 들어가봤더니
댓글이 몇 개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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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광남: 안냐세요~ 글구 힘내세요~ ㅎㅎ
★ 빛 꼬라지하고는: 아 그 병원 저도 갔었는데 님은 저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네요 ㅜ_ㅜ
★ 트리플 빛: 반갑습니다! 빛씨가 하나도 없는 경우는 저희 까페에서도 처음이네요.
★ 내빛 돌려내: 그 병원, 난 좀 맘에 안 든다니까.
★ sExY bAbY: ★친구가 2달만에 빛다찾았는데 저두 따라했죠 헉! 1달만에 빛다돌아왔구요
유지두 넘 잘하구있어요 어두운 나날들 이젠 안농이네요ㅋㅋ
요즘 너무 이뻐진 연예인들도 이걸로 빛 찾았대요.
네이버,다음 검색창에 ♥빛조아샵♥ 쳐용~★ http://www.bitzoa.com
★ sjlre665: 영자님! 위에 광고글 좀 잘라주세요! 정말 꼬라지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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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글을 죽 읽어보니 각종 민간요법이나 어디서 치료를 받았더니 효과가 있더라는 말은 많았는데
대부분 실효는 없는 광고인 경우가 많았다. 회원수가 많은게 이유가 있다니까 그래.
하여간 지금으로서는 여기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
맥주 두 캔 정도를 마시고 멍하니 누워있으니
할아버지와 소식을 들은 몇 친구들의 전화가 왔었고, 그 뿐이었다.
치료도 소용없고 학교도 못 가게 되었고 미정이도 떠나갔다.
빛을 잃으니 무엇보다 인생 자체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낀다.
[2006년 12월 11일]
점심먹고 집에 있는데 할아버지가 올라오셨다.
여러가지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는데 비둘기라던가 반딧불, 숭어 등
어제 까페에서 본 민간요법 내용 그대로였다. 할아버지의 마음쓰심이 눈물겹다.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당신 친구분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하시면서
위로를 해주시고는 폐끼치기 싫으셨는지 금방 돌아가셨다. 고마우신 분.
차마 빛씨가 하나도 없는 케이스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저녁에 혼자 밥을 먹다가 울컥하는 구토감에
화장실로 뛰어갔더니 입에서 검은 액체가 쏟아져나왔다.
처음 봤다. 이런 것은. 난 오징어가 되어가는건가.
좀 진정된 후에 컴퓨터를 켜보니 메일이 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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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까페에서 글 보고 쪽지드려요. 저도 그저께 갑자기 빛을 잃었고
오늘에서야 을지로의 그 병원에 갔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저도 빛씨가 하나도 없는 증상이고,
똑같은 증상의 청년이 엊그제 왔었다고 하시던데 눈빛님일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얘기는 눈빛님에게는 미처 못했다는데
빛을 잃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은 눈빛님과 제가 처음이라네요.
외국에서도 발견된 적 없대요. 그래서 못 고친다고 하시는데,
너무 슬퍼서 그 사람 많은데서 마구 울었답니다. 챙피하게.
가족들에게 얘기도 못했어요. 물론 친구들한테도요.
혼자만 떨어진 것 같아 집에 와서도 계속 울고 그랬는데
까페의 눈빛님 글이 생각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메일 드리는 거랍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전 아까 검은 물을 토해내고
너무 울어서인지 눈물색까지도 회색빛이예요. 무섭고 떨립니다.
눈빛님은 괜찮으신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답장 부탁드릴게요.
제게는 큰 힘이 될 것 갈습니다.
초면에, 아니 초면도 아닌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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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 똑같은 증상의 사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기대려고 하는 사람.
그러나 빌려줄 어깨가 나한테 있긴 한걸까.
일단은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 또한 혼자이기는 싫다.
같이 상황을 나누고 해법을 찾아간다면
분명 나 혼자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쩌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한 번 만나서 얘기해봐야지.
답장을 쓰는 중에
눈이 가려워 옷 소매로 살짝 비벼주었더니
흰색소매에 진한 회색물이 번져있었다.
그녀도 그렇고 나도,
우리는,
회색의 눈물을 흘리는
빛을 잃은 사람들이구나.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