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를 표방하는 연애소설 카베(벽) 2편입니다.
소설은 다른 장르의 글보다 쓰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플롯을 잡는 것부터 세세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퇴고를 반복, 또 반복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바로 '그 글'이 되기는 커녕
점점 멀어져가는 못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고보면 세간에 웃음거리, 비난거리가 되는 귀여니양도 참 대단한 사람이예요.
카베 2편은 카베 1편에서 스토리가 이어지며 폭력의 미학 5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미리 보시면 이해하기 편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문성자작단편연애소설 - 카베(壁) 1편"
"폭력의 미학 5부 - 오로라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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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면의 벽
그 날
후지타란 녀석을 실제로 본 이후 픽션으로 규정되어 있던,
그렇게 믿고만 있던 나의 불안감은 어엿한 현실이 되었다.
사실 아무런 물증도 어떤 증인도 없었지만 그 이후 내 맘속의 의혹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머리를 내밀고는 검은 그림자를 징그럽게 넓혀가며
내 숨통을 조여가고 있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그녀석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를 보고 손을 가리며 귀엽게 웃던 토모에가 떠오른다.
냉정해지자. 그럴리 없어. 그저 친한 직장동료일 뿐일거야.
아무 것도 아닐거야. 아무 것도 아닐거야. 아무 것도 아닐거야.
이불을 푹 덮어쓰고 수없이 중얼거리지만
그럴 수록 그녀석의 얼굴은, 토모에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
내 몸을 누르고 내 고막을 찢어놓는다.
"아악!!!!"
극에 달한 답답함과 무서움에 소리를 내지르며 이불을 쳐내 벌떡 일어나 앉아보지만
오히려 내 작은 방 사면의 벽이 심야의 정적 중에 나를 비웃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낮에는 다만 느껴지기만 하던 벽은
밤이 되면 자신의 시커먼 얼굴을 드러낸다.
내 방에 있든 친구집에 있든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든 술집에서 사케를 홀짝이든
사면의 벽은 어디든 따라와 나를 견고히 둘러싼다.
그리고는 잔인하게 내 감정을, 그녀의 감정을 잘라내고 토막낸다.
내 이런 불안하고 두렵고 슬픈 감정은 이 방을 차마 나서지도 못한채
벽 한쪽면에 부딪혀 잔인하게 깨뜨려질 뿐이고
아마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그녀의 애틋한 마음씨도
역시 이 벽들의 반대쪽 면에 부딪힌 후 서글픈 눈물을 흘리며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매일밤, 절단된 감정의 조각조각들만이 벽 아래 처참하게 쌓여가고 있다.
#5 일요일의 데이트
일요일은 그녀와 나의 날이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고 계약 같은게 있을리도 만무했지만
사귀는 4년동안 어느새 뿌리를 박아버린 우리만의 규칙이었다.
회사에 들어가고 내다리무쇠다리내머리소갈머리 족발체인의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더욱 바쁘고 분주해진 그녀이지만
일요일만큼은 나를 위해 꼭 작은시간이라도 내준다.
오늘처럼 말이다.
또각또각.
새하얀 하이힐이 리드미컬하게 도로를 두드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내 곁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
어깨까지 단정하게 내려오는 검은 머리가
걸음에 맞춰 귀엽게 술렁이며 내게 묘한 감흥을 선사해준다.
그래. 이렇게 함께 걸은지도. 벌써 4년이 되었다.
그녀는 유난히도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
동아리 선배 하지모토는 그녀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하고는
동아리방에서 꼴사납게 눈물을 줄줄 흘려댔었고
우리가 한참 사귀고 있던 대학 졸업반 시절엔 난데없는 열아홉살 신입생 녀석이
- 다마네기군이라 했던가 -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 근 6개월을 지겹도록 쫓아다니기도 했었다.
그 밖에도 강의실, 버스정류장, 회사 등 각지각처에서 그녀에게 반한 남자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어찌보면 그녀가 너무 잘난 탓이고 어찌보면 남자친구인 내가
너무 못난 탓이다. 남자친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들 달라붙었으니 말이다.
뭐.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모토도 다마네기도 아닌 나의 옆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난, 그녀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벽이란 것도 그냥 내가 상상해낸 불안의 응집, 그 한심한 배설인지도 모른다.
요즘 벌어진 그녀와 나의 사회적 격차,
자주 보지 못하는 시간의 간극 같은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있지도 않은 벽을 나 혼자 세워놓고 그 앞에서 덜덜 떠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즈야군. 무슨 생각해?"
"어?... 아하하. 아냐. 아무 것도"
"피곤한 눈을 하고 있네.. 잠 제대로 못 잔거야? 뭐야, 또 게임 하느라구?"
"뭐.. 그렇지 뭐. 늘 그렇듯이 헤헷 위닝 일레븐은 한 번 잡으면 손을 뗄 수가 없더라구 헤헷"
"카즈야군도 참.. 건강까지 헤쳐가면서 노는게 그리 재밌니? 남자들이란 참 이해하기 어렵단 말야"
"토모에도 한 번 해보라니까. 해보면 알거야. 암튼 요즘 아버지 사업은 어때? 겨울이라 족발이 조금 주춤할테지?"
"치이 말 돌리기는... 괜찮아. 조금 부진하긴해도 그리 나쁘진 않아. 우리 집이 어디 보통 족발집이니 후훗"
"그래 맞다 맞어요 족발공주님~"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카즈야군!!"
"어 미안 미안 그리 너무 쉽게 발끈하지 말라구~"
거짓말이다. 위닝 일레븐 따위. 그만둔지 석 달이 넘었다.
매일 밤 그 악몽같은 시간을 어떻게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라. 카즈야군. 아까 말했듯이 나 다섯시까지는 가봐야돼서.. 이제 슬슬 가야할 것 같애"
"응. 알어. 아버지가 회사로 나오랬대며"
"응. 오늘까지 우리 족발집 로고를 새로 정해 광고회사에 보내야 한다고 해서.."
"그래 얼른 가봐야지. 족발집 로고라 해서 너무 돼지나 돼지다리 같은 이미지에 치중하지는 말고"
"물론이지~ 걱정말구"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줄게"
"아냐아냐 기사아저씨가 요 공원 앞으로 오기로 했어. 걱정마"
"어... 그래 그럼 거기까지만이라도..."
"응! 고마워"
공원 앞, 기사아저씨는 벌써 차를 정차시켜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트 하다 몇 번 본 적있는 사십대 중반쯤의 마음좋게 생긴 아저씨.
나를 보고서는 언제나처럼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아가씨의 남자라 그런거겠지.
이윽고 검은색 세단은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고
창문을 내리고 잠시 손을 흔들던 토모에의 모습도 어느새 사라져갔다.
자. 이렇게 오늘의 데이트는 막을 내리는구나.
그런데,
사실일까.
정말.. 아버지가 부른게 맞는 걸까.
확인하고 싶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고
나의 걱정이 모두 망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그녀와 나 사이의 벽이 사실은 스티로폼으로 급조한,
툭 건드리면 와장창 무너지고 마는 별볼일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다.
그래야 오늘 밤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우리 사랑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심하는게 아냐.
확인하고플 뿐이야.
그녀를 믿지 못하는게 아냐.
그녀를 믿고 싶은거야.
그녀를 속이는게 아냐.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거야.
"앞에 가는 검정색 차 보이시죠? 아뇨. 그거 말구요. 저기 신호등 앞에 서있는 어코드요.
예. 그거 쫓아가주세요. 들키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주시구요"
어느새 난 택시뒷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는 초조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 6 사랑을 확인하러 왔어요
하카타역 앞에서 그녀를 내려두고 차는 떠나갔다.
나도 200미터쯤 덜 간 곳에 택시를 세운 후 건물 그림자에 몸을 묻히며 침착히 그녀를 따라갔다.
내다리무쇠다리내머리소갈머리 족발의 본사는 하카타역에서
아오카마리쪽으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워낙 차들이 많고 복잡한 거리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하카타역에서 내려 7~8분 가량 걸어서 가곤 한다.
지금의 토모에처럼 말이다.
그녀는 틀림없이 회사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몇 번 하카타역에서 족발본사까지 그녀와 함께 걸어간 적이 있어 이 길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를 속인게 아니었다.
점점 작아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난 스스로를 향해 아득할만큼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4년이나 믿고 의지해왔던 여자친구를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느낌만으로 불신하고 의심하여
뒤를 쫓고 있다니.. 돌아가자. 이건 옳지않아. 이만큼 확인했으면 충분하다.
'빵빵'
뒤에서 자전거가 길을 비켜달라고 소리를 냈다.
사람많은 길에서 하필이면 인도로 다닐게 뭐람.
뒤를 살펴 자전거를 피했다.
그리고나서 다시 앞을 보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다.
이건 이상하다.
아직, 사라질 때가 아닌데.
본사는 이 길이 끝날 때까지 간 후 다시 길을 건너 반블록 정도를 더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길에서도, 길 건너편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쿵쾅’
순간 심장이 크게 동하기 시작했다.
밤도 아닌데 사면의 벽이 시커먼 얼굴을 드러내며
일제히 땅 속에서 솟아오른듯한 느낌이 들었다.
밤마다 내 몸 속에서 꿈틀거리던 불안과 의심과 그 외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덩어리져서 폭발할듯 요동치는게 느껴졌다.
머리 속은 텅비어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발걸음이 빨라진 난 그녀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면의 벽. 그 더러운 녀석 또한 날 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이 녀석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내 뜀박질은 더 빨라졌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아 거치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그녀가 사라짐직한 장소에 도달했다.
숨을 몰아 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띤 곳이 은행.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이다. 은행은 열지 않는다.
1층에 제법 큰 편의점이 있지만 내부인테리어 공사관계로 역시 문을 닫고 있다. 여기도 아니다.
그럼 미용실? 토모에는 지난 주에 머리를 새로 했고 대단히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니
근간에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2층을 보니 '까페 브란디아'라는 초록색 간판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빨리 내 발걸음은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타고 있었다.
까페의 입구는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흰색과 민트색으로 단정하게 꾸며놓은 입구.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다.
망설일 것 없다.
심장은 여기로 오는 내내 미친듯이 소리지르고
사면의 벽은 여기까지 따라와 내 몸을 조이고 있다.
이젠 망설일 수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맑은 커피 냄새가 공기중에 차분히 흘러가며 나를 맞아주었다.
크고 환한,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카페였다.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로 맞이하려는 종업원을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테이블을 죽 훑어보았다.
까페안은 제법 컸지만 기둥없이 일자로 뻗은 시원한 구성이라
한눈에 저편 구석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내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멀리 벽쪽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는
한 쌍의 낯익은 남녀를 너무도 쉽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건
두 말할 것도 없이,
후지타와
토모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