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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자작단편연애소설 - 카베(壁)

문★성 2006.01.18 21:04 조회 수 : 249


#1 그래. 너야


후지카미 토모에를 만나기 시작한지,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귀게' 된지
벌써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난 예전부터 이 '만나다'와 '사귀다'의 혼용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그래도 남들로부터 확인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 - 상당히 번거롭다 -
늘 자세하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다시말해, 난 그녀와 '사귀고' 있다.
별거 아닌걸 너무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처럼 들릴테지만, 사실 이건 실제로도 대단한거다.
만약 당신이 나와 토모에를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대학시절 친구들, 후배들, 심지어는 교수님들까지도
토모에와 사귀고 있다 얘기하면 뒤로 나자빠질듯한 오버스런 제스쳐를 취하며
사실여부를 몇 번이나 되묻곤 한다.
그럴만도 하다. 대학시절 학교 안팎에서 전혀 튀지 않는 과묵한 존재였던 나에 비해
토모에는 꽤나 아름다운 얼굴에다, 좌중을 휘어잡는 리더쉽까지 갖춘
상당히 매력적인 여학생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연애초반에는 친구, 가족을 포함한 주위의 누구도 이 '사귄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하였다. 나도 굳이 이를 입증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덕분에
4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토모에가 약점 잡힌 것이 분명해' 내지 '이건 전일본을 대상으로한 사기극이야'와
같은 소리를 심심찮게 듣곤한다.
그래도 이것마저도 우리의 연애에 있어서는 둘이서 머리 맞대고 키득댈 수 있는
재미이자 즐거움이기에. 나와 그녀는 마냥 웃을 뿐이다.  



시작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 축제의 마지막 날.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그녀와 난 그 날 저녁 노천에 펼쳐놓은 간이까페를 정리하고서는
도서관 옥상으로 올라가 축제의 하이라이트,
불꽃놀이 - 라고 해봤자 학교 차원에서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
를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 눈을 감아도 그 광경이 사르르 펼쳐질만큼 내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장면 자체의 아름다음 때문이라기보단
그 장면을 배경삼아 펼쳐진 잊을 수 없는 추억 때문이지만 말이다.

우린 말없이 빛의 포탄이 밤하늘에 여기저기 뚫어놓고 있는 크고 작은 구멍들에
심취해있었다.
  
한 십분정도 지났으려나. 갑자기 토모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채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말했다.

'있잖아. 카즈야군...'

'응 왜?'

'혹시 좋아하는 여자애 있어?'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 그러나 본능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런 말이 나왔는지 황당할 정도로,
난 정말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너야'

자신이 뽑아놓은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스스로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나의 대답은 그녀의 목소리로 즉석에서 익혀져 다시 돌아왔다.

'응 나도 네가 좋아, 다행이네..'  


우습긴하지만 그게 전부. 그날부터 우린 사귀기 시작했다.

시시하다. 나도 알고 있다. 그녀도 알고. 이 얘기를 들은 사람 모두가 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 이후로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 우리 두 사람이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에 들어와 그 날의 불꽃놀이를 둘이서만 보게된
그 '놀라운' 확률을 통계적으로 추산하기까지하면서
(계산결과, 삼천만분의 일 정도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사랑의 절대성과 특별함에 정당성을 수없이 부여하였고,
또 우리 자신도 어느새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았다. 이 사랑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신이 허락한 - 인간이 허락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니까 -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일거라고.

그래. 사실 운명이니 기적이니, 그딴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잘 사랑하면 되는거니까.
그래도 사랑이란 것은 가끔 절대성과 위대함으로 광을 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때아닌 16세기 '운명론'을 들고와 우리 사랑을 포장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그 운명이 떡하니 있었으면 하며 우리 두 사람이 희망해온 바로 그 자리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물질 하나가 대신 자리잡고 있다.



#2 여기에는 벽이 있다

벽이다.
마음의 벽일지, 육체의 벽일지, 생각의 벽일지 그것조차 자신할 수는 없으나
그 놈이 우리 둘 사이에 아주 두텁게 자리잡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함께 손 잡고 영화를 볼 때, 마주앉아 밥을 먹을 때,
심지어 뜨겁게 입맞춤을 할 때조차 그 녀석은 우리 둘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자리잡아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두 연인을 한없이 무겁게 하고, 또 멀어지게끔한다.


벽의 돋움은 우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밥벌이를 위해 취직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대학 내내 빈둥거리면 논 탓에 별볼일 없는 중소기업에 간신히 들어간 나와는 달리,
그녀는 높은 학점과, 외국어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끔하고 단정한
외모 덕분에 들어가기 어렵기로 유명한 대기업의 면접을 무난히 통과하여
일명 잘나가는 부서에서 맹활약하게 되었다.
대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아마 그녀가 버는 돈은 내가 버는 것의 두배는 족히 될 것이고,
허리선이 예쁘게 들어간 정장을 입고 다니는 그녀에 비해
대학시절과 똑같이 후즐그레한 청바지에 남방하나 걸치고 다니는 나는
겉보기에도 무척이나 부족하고 한심해 보일 뿐이다.  

애초부터 집안의 차이가 있긴 했다. 그녀는 도쿄시내에만 45개 정도되는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내다리무쇠다리내머리소갈머리 족발' 사장님의 딸이니까.
그에 비해 우리집은 일년에 족발 한 번 뜯기힘들 정도로 빈곤한 살림.
특히 비싸기로 유명한 '내다리무쇠다리내머리소갈머리 족발'은 사실
그녀 만나기 전에는 한 번 먹어본 적도 없었다.
(사귄 이후에는 신물나도록 먹었다)

거기까진 괜찮아. 집안 돈이 뭐 내 책임인가.
그러나 현재의 내 모습은 분명히 내 책임소관이며,
그런면에서 난 할복자결할 자격도 없을 만큼 못난 녀석이다.
비단 내 생각만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도 분명 그럴거다.

한층 더 끔찍한 것은, 그녀와 나의 이 상당한 격차를 메우고 있는 것이
내가 말한 그 놈의 벽이라는 거다. 우리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벽은 발을 돋아 한뼘씩이나 커지고 배에 바람을 불어넣어 한 아름씩 더 두꺼워져버린다.
넘을 수도 없고 뚫을 수도 없고 부셔버리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내겐 너무나도 까마득한, 그리고 갈수록 까마득해져만 가는 난공불략의 벽.

그녀도... 느낄까. 이벽을?


"카즈야군!!!"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 앉은 토모에의 모습이 보인다.
아까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힘없는 수증기를 뻐끔뻐끔 토해내고
토모에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는 중이다.
이마에 살짝 그려진 주름이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냐라고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대체 왜 그래?? 멍하니.. 무슨 생각하는거야?"

"아.. 아니. 나도 모르게... 미안해."

"요즘 자주 그러는 것 같애. 카즈야군. 좀 이상하다니까."


내가 이상한게 아니다.
벽 때문이다. 토모에 너도 알고 있잖아.
하긴 모를리 없지. 평지를 내달려 서로에게 질주하던 우리 마음이
이제는 매번 두터운 장애물 하나씩을 넘어야 되니까 말야.
나보다도 똑똑하고 눈치빠른 그녀가 모를리 없어.
그러나 나는 말한다.

"그래? 요즘 정신이 조금 멍하네. 술 좀 끊어야할 것 같아, 정말"

  



#3 찾았다

이 녀석이다.
평소 스스로의 직감에 대해 신뢰를 보이지 않던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전재산- 몇만엔 없지만 - 을 걸 수 있을만큼 확신이 든다.

얼굴도 그저 그런데다가 두터운 안경을 낀,
특별히 잘난 것 없는 듯한 보통의 녀석. 그러나
이 녀석이 바로 우리 사이에 실존해있던 '벽'의 원흉, 혹은 벽 자체라는 것을
처음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이다.

"카즈야군. 왜 그래? 사람을 괜히 노려보는 것 같애"

토모에가 슬쩍 팔꿈치로 건드리며 주의를 준다.

"뭐?.. 아. 아하하. 그랬나. 이거 죄송합니다. 후지타씨라고 했나요?"

"예 그렇습니다. 후지카미양으로부터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정말 영광이네요"

"어머 후지타씨도 참.."

순간 그녀의 눈가에 살짝 걸려있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눈웃음.
저건 일반적이고 노멀한 눈웃음이 아니다. 4년동안 희노애락의 각종 눈빛을 수십만번 보아왔던
난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 녀석이 확실하다.

그래.
쳐야된다. 지금 무너뜨려야 한다.
지금 이대로 놈을 놔두어버리면 벽은 금새 더 자라나버려
내가 넘기는 커녕 넘볼 수도 없는 높이가 되어버릴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뻔뻔한 녀석의 멱살을 잡고
'한 번만 더 토모에 앞에서 얼쩡대면 네 놈 모가지로 돈까스를 튀겨먹을테다'
라고 윽박질러야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최대한 인상을 찌그려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얼굴로 위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토모에는, 토모에는. 가버린다. 그냥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토모에는 가버린다.   

지금이다.
뭘 망설이는거냐. 카즈야.
손을 들어. 놈을 잡아. 외치라구. 토모에는 내 것이라고!


"자아자아 전 퇴근해보겠습니다. 두 분도 퇴근시간에 회사앞에서 이러지 마시고
  얼른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가셔야죠. 후지카미씨도 모처럼 그이가 회사 앞까지 찾아와줬으니
  재밌게 잘 노시구요"

"고마워요. 후지타씨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

하지 못했다. 감은 확실했는데, 절호의 타이밍이었는데 하지 못했다.
아니었을 경우가 두려웠기 때문일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기 때문일까
그녀의 질타와 뒤를 이을 잔소리가 눈에 선히 보였기 때문일까.

... 아니다.
난 무서웠던거다. 그 사람이 뻔뻔히 눈을 올려 나를 쳐다보며

'이거 원. 별볼일 없는 놈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막되먹은 놈일줄이야.
  토모에의 사랑이 한 때라도 너한테 머문게 신기할 정도다'

라며 말할 것 같았기에
아니, 그보다 토모에가

'어머, 카즈야군.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더 잘 됐네. 말하기 껄끄러웠는데. 후훗'

이라며, 내가 4년동안 한 번도 보지못한 코웃음을 치며 날 경멸할 것만 같았기에.

아니, 그보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우리의 관계가 한순간 와장창 무너질 것 같았기에.

내가 알던 그녀가 내가 모르는, 몰라야만 하는 그녀가 되고
같이 나누던 삶이 혼자만의 삶이 될 것 같았기에

반갑게 맞이하던 미소가, 적대로 가득찬 냉소가 되고
모세혈관 곳곳에 박혀버린 그녀의 느낌을, 그녀의 감촉을,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의 추억을
일제히 도려내어 내 몸 밖으로 내던져버려야 할 것 같았기에.
다름아닌 나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난 그게 너무도.. 무서웠다. 무서워서..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이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모에는
후지타의 떠나는 뒷모습을 거들떠보지도 않은채
내 팔짱을 살갑게 끼고는,

'우이~ 춥네. 오늘 저녁은 우동으로 먹자. 조기 울 회사 뒷쪽에 괜찮은데 있으니까. 오늘은 내가 쏠게, 괜찮지?'

라며 싱긋 웃음짓는다.


위선이든 아니든, 그녀의 미소를 보며 난
두려움에 얼어붙은 다리를 녹여 움직이면서
미소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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