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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사회 만만세

문★성 2004.12.30 18:13 조회 수 : 262

1. 바람의 아들



중학교 때로 기억난다.
주일 교회에서 한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주 토요일에 동아쇼핑센터에서 만나 놀자고 약속을 했더랬다.
대구에서 동아쇼핑센터는 서울 을지로입구 롯데백화점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우리는 토요일 학교 끝나고
한시반쯤 만나기로 했었다.


지금도 살아있는 동아쇼핑의 전경

시간을 흘러 토요일이 왔다.
그러나,
장기기억력이 정상인보다 확연히 떨어지는 난
그 약속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려 네시반까지 남문시장 근처 남문오락실에서 뿅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왜 우리 옆집인 진주오락실을 버려두고
걸어서 20분이나 가야되는 곳까지 원정을 나갔냐하면
옆집에서 깐죽거리다 어머니께 적발되면
아주 곱상하게 맞아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당시 유행하던 격투 게임 월드히어로즈를
손톱이 갈려서 정사각형이 되도록 미친듯이 하고나서
후련한 마음에 집에 돌아온 나는 곧 비보를 전해들었으니,
친구 하나가 삼십분에 한 번씩 전화와서 날 찾았다는 것이다.
약속을 했는데 왜 이리 안 오냐고.


월드히어로즈2. 왼쪽 캐릭터 드래곤을 잡으면 거의 진적이 없었다.

아차. 그제서야 난 내가 평소와는 달리 스케줄이란 걸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순간 속이 시커멓게 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집밖으로 튀어나와 머리를 때리며
동아쇼핑센터로 미친듯이 뛰어갔다

어느새 난 벤 존성, 칼 루이성이 되어 있었다.
차들도 나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방금 뭐가 지나갔어?'
'에이 그냥 바람일거야'
라고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도착한 약속장소.
시계를 보니 이미 다섯시였고
당연히 친구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주 죽을 죄를 짓고 만 것이다.
공중전화를 찾아서 녀석 집에 전화를 거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주위를 한 삼십분 정도 서성거리면서 혹시나 근처에서 놀고 있지는 않을까
동네 오락실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결국 그냥 집에 와야만 했다.

밤 늦어서야 겨우 녀석과 통화할 수 있었다.
별로 화내지는 않았다. 괜찮다고 했다.
근데 혼자가 아니었단다.
재밌는 친구 하나 소개시켜준다고 지 친구 하나 데리고 나와
같이 기다렸단다. 세시간 가까이나.
상당히 곤란한 입장에 처했을 이놈의 무덤덤한 말투를 들으니
뭐라 할말이 없었다.
난 이 녀석에게 잘못을 함과 동시에
이 녀석마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얼마나 몹쓸 짓이었단 말인가.

이후에도 그 친구와는 계속 친하게 지냈다.
군대 가기 전까지도 연락을 주욱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은 후 한 번도 따로 만난 적은 없다.
어쩌면 그때 내가 신용이란 것을 깨끗하게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에 말이다.
그 시절 핸드폰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삐삐만 있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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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건 책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어




내가 주로 약속을 잡던 곳은 중앙로 제일서적 1층이었다.
책이 가득히 쌓인 공간에 조금 일찍와서
신간코너 슥 훑어보며 새로나온 애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이런저런 코너들 뒤적거리다가 어느새 얼핏 보이는
익숙한 모습들에 슥 책을 내려놓은 후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여기라면,
사람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제일서적의 전경 (불펌했음-_-)

그렇다.
나의 약속장소가 무조건 제일서적이어야 했던 것은
사실 내가 책을 좋아해서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늦을지도 모르는 그 확률높은 상황에서
시간 때움이 이보다 더 쉬운 장소는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늦을 수 있고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이기가 없던 시절
나는 그 '늦음'의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안절부절 시계 바라보며 왜 안오는지 고민하기 보단
또, 밖에서 덜덜 떨면서 군시렁군시렁 거리기보단
여유있게 책이라도 보고 있는게 맘이라도 편했던거다.

그곳 제일서적에서, 난 아무 기약도 없는 친구를
한시간 반동안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래도 나은 편.

늦더라도 상대방이 오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혹시 두 사람의 말이 잘 못 전달되어 약속장소를 다르게 알고 있다면?
예를 들어 한 사람은 대구백화점 본점에 가있고 한 사람은 대백프라자에 가있다면
즐거워야할 그날 약속은 재앙으로 화한다.
두 사람다 한껏 폭발할 듯한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게 되는 셈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었던가.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런 폭발할듯한 위험 상황에 처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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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삐삐의 강림




고등학교 시절 삐삐가 이 세상에 강림해버리셨다.
수업시간에 삐삐가 울리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내리쬐는 시절이었건만
그래도 삐삐 때문에 세상많이 변해갔다.
적어도 상대가 어디있든 연락은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내 삐삐는 대략 이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모든 약속의 형태를 일거에 바꿀 수는 없었다.
삐삐란 것이 그 본질상 늦는 사람이 기다리는 이의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 지가 답답해서 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훈련소에서 공중에 대고 터트리는 함성 같이 말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버스를 타고 제일서적으로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치자.
근데 길거리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지 새마을운동을 하는지
길이 무지 막히기 시작한다. 차는 멈춰섰고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지난 주 산 따끈따끈한 삐삐의
차가운 플라스틱 감촉이 느껴진다.
꺼내본다. 이걸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
근데 버튼 두개 액정 한 줄 달랑 달린 이 무식한 기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되려 징징 울리기만 할뿐이다. 번호를 살펴보니 보낸이의 다급한 마음이 절실히 전해진다.


  82828282


시간을 보니 벌써 삼십분 초과했다. 이거 적잖이 욕먹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어쨌거나 삐삐가 끄지않은 알람시계처럼 울려대든
음성메세지가 삼십다섯개 도착했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바라보는 일 뿐이다.
  
성질급한 사람이라면 다음 버스정류장에서 냉큼 내려
'나 늦을 것 같애' 라 삐삐치고
다시 버스타겠지만 또 모르잖은가. 다음 신호등에서 길이 뻥 뚫려
순식간에 약속장소에 다다를지. 게다가 그 땐 환승할인도 안 되는 시기였었고.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진보보단 보수가 대다수의 선택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트래펑을 부은 것도 아니니 갑자기 길이 잘 뚫리는 경우는 희박하다.
결국 한 시간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고 상대방이
있어야 할 자리는 환하게 비어서 빛나고 있다.

이미 다른 곳에 들어가있나? 잠시 다른 곳에 갔나?
그래. 공중전화, 공중전화가 필요해.
황급히 중앙파출소 앞 공중전화로 달려가니
세상에 줄이 150M는 되겠다.
하긴 그 당시는 공중전화 앞 사람이 통화 길게 한다고 칼로 찔러죽이는
그런 무서운 세상이었지.
이런 와중에도 계속 내 삐삐는 울어대며
다음과 같은 무서운 메세지까지 아낌없이 뇌까리고 있었다.

8282181818 (현실감을 주기 위해 그대로 재현)

아아.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아아아아아아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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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보화 사회 만만세




5학년 4반 반장 철수는 일요일 아침 눈 비비고 일어나
아침먹고 KBS에서 나오는 만화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던중
갑자기 어제 선생님께서 내려주신 숙제가 생각이 났다.

뭐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전화로 물어봐야겠다.
그는 가나다 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수첩형식의 전화번호부를
거실로 들고나와서 반에서 젤 이쁜
부반장 영희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건다.

따르르르릉~

최민식 같은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시오'

영희 아버지구나.
철수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또박또박 말해본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영희 친구 철수라고 합니다. 영희 집에 있어요?'

'...누구냐.. 넌?'

'그러니까 영희 친구 철...'

'없다!'

'아.. 저기...'

철컥. 뚜뚜뚜뚜...

차가운 신호음만이 수화기에 반복될 뿐이었다.
철수는 할 수 없이 전화번호부에서 반에서 두번째로 이쁜
말자의 번호를 찾는다.
그러다 갑자기 뒷통수에 느껴지는 둔탁한 감촉, 퍽.
돌아보니
큰 누나가 빨래 방망이를 들고 있다.
방망이 끝에 묻은 벌건 액체는 분명 자신의 혈흔일저
철수는 악에 받쳐 소리지른다.

'왜 때려!'

그러나 오히려 복부에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이 있었으니
비수같이 날라온 아버지의 재떨이었다.
숨막혀 캑캑거리는 철수에게
두 가해자는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전화기가 니꺼니 빨리빨리 끊지 못해?!'

(후략)

자아. 이 얘기, 언제적 이야기로 느껴지시는가.
1975년? 뭐 그 때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접해본적 있는 사람으로서
별로 이상하지 않다. 있을만한 일인 것 같다.

그런데 1995년이라 해도, 사실 괴리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분명 내가 경험한 삶이니까.

그러나 2005년. 이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얘기가 되었버렸다.
요새 어느 집안에서 저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래,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관심가지고 돌아보면  '급박하게 변화하는 정보화사회'라는 말이
그냥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할만큼
세상은 참 편하게, 그리고 빠르게 바뀌어져가고 있다.  

비단 앞에서 얘기했던 약속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렇듯 문명의 놀라움을 흠뻑 젖도록
만끽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보화 사회 만만세가 아닐 수 없다.

인터넷, 무선인터넷,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카메라폰, 내비게이션
MP3, PDA...

2005년은 또 어떠한 변화가 내 삶을 바꾸어 놓을까.
호불호를 떠나 일단은 기대가 되는 바이다.

과연,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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