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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이름으로...

문★성 2004.11.23 22:44 조회 수 : 405

국민학교 다닐 무렵 가장 많이, 자주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씨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였다.

분식회계를 비롯한 각종 비리와 경영실패로 인해

세계적으로 이름날리던 회사 홀딱 날려먹고 지금은 유럽 어딘가에서

바둑이나 두면서 소일한다는 이 영감님의 자화자찬 스토리가

그 땐 그저 멋있게만 느껴져서 누렇게 손때를 묻혀가며

몇 번씩 되읽었던 기억이 난다.

'돈 벌면 강남에 까페나 차려서 편하게 살거예요'라는

젊은이들에게 '정신상태가 글러먹었어 이놈들아'라고 호통치고는

'세계를 누비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날 봐라'라 떳떳하게 말하던 그는

내게 있어서는

이런말 하기 조금 쑥스럽지만

일종의 영웅이었다.



바로 이 사람!



아 물론 나의 '영웅석(英雄席)'은 김우중씨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주영씨의 자서전 (이건 대선을 전후해서 나온거라 의도가 꼼상했다)

이명박씨 자저선 (이건 매우 재밌었다. 누누히 말하지만 난 이명박씨 대선에 나오면 찍을거다)

박태준씨 자서전(이건 무지 재미없었음)

까지 내 방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으며

어릴 적 산 소년소녀 위인전 세트는 닳도록 읽어대었다.

또한 하도 많이 읽어 전질을 모조리 찢어먹은 삼국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다 노부나가나 미야모토 무사시, 징키스칸에 이르기까지

내가 즐겨 모은 책은 대부분 치열한 시대를 살아간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도 이런 습성 버리지 못해

스탈린이라든가 카이사르, 히틀러 관련서적을 구해서 읽고 있는 나를 보면,

난 뭐랄까.

영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인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우뢰매를 보며 에스퍼맨을 부르짖던 친구들이

하나씩 나이들어 현실을 바로 보기 시작할 때

나는 새로운 타입의 영웅을 발견하여 마음 속에 꾹꾹 눌러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나랑 똑같이 '현실세계'를 살아갔던 인물들로 말이다.  주1)



인생이란 것은 그리 녹녹하지 않기에

주먹불끈 쥐고 첫출근 하며 세상은 내것이다 포효하던 신입사원도

애인생각에 눈물글썽하며 국가수호에의 의지를 곱씹던 신병도

우리 남편 꼭꼭 껴안아주며 영원토록 사랑해야지 하던 새색시도

어디 예쁜 여학생 없나 두리번두리번 360도 모가지 돌려대던 신입생도

다들 준엄한 의식들로 무장하여 새롭게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몇 달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축 늘어진 어깨로 초지일관 시들해져 꾸역꾸역 재미없게 살아가기 마련.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떠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 그러한 자극의 원천은 '영웅'이였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동경심의 발로임과 동시에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품없는 현실에 대한 도피처로서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힘이 되었고

가슴 두근거리는 자극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나잇살 살짝 먹은 지금,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에 자극을 받아 전기쇼크기에

심장압박받는 응급환자처럼 들썩들썩거리긴 하지만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깨끗하게 말라붙어있다.

근본적으로 난 그런 '대단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건데 각종 위인전 영웅전들을 읽으면서 내가 목표로 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그들을 보좌하는 조연이었다.

그들의 강력한 리더쉽안에 몸을 담그면서

실질적인 조력을 통해 그들을 세워주는 입장.

삼국지에서 나의 베스트 캐릭터가 조조가 아닌 '하후돈'이었던 것도,

꼬마시절 커서 뭐할래 물어보면 대부분 '로보트 조종사'라 떵떵거렸지만

난 '그 로보트 내가 만들어줄게'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쩌면 리더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기피하고자 하는 치사한 마음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난 내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토록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영웅들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일은

아무리 철없는 어린 마음이라 할지라도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 그런 대단한 인물은 어찌하면 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뜸한 시대이니 만큼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은

딱 세 개로 한정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정치인, 둘째는 기업가, 세째는 스포츠맨.

뭐 다른 길도 있겠지만 잘은 모르겠다.

목사님이 영웅이 된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

공무원이나 선생님이나 회사원도 물론 그러하니

내 짧은 머리굴림으로는 위의 것들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 중에 정치인은, 특히 한국에서의 정치인은 워낙 욕을 많이 먹는 업종이니

'영웅스러운' 인물들의 진출이 상당히 적을 것이라 기대되고

스포츠맨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쳐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있으므로 '축구'와 몇몇 올림픽 종목에 한정되어 있다고 보면 되나

이 역시 쉬운 길은 아닌 것 같다.

황영조나 히딩크 쯤 되어야 '몬주익의 영웅', '2002 월드컵의 영웅'

소리를 듣는거다.


그렇다면 역시 결론은

앞에서 줄줄히 말한 김우중-정주영-이명박-박태준씨와 동류를 형성하는

기업가가 아닌가 싶다. 많은 대학생의 꿈으로 숭상받는 CEO가

현대의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도전해볼만한 영웅유형이라는 소리다.


서울대학교라는 제법 특이한 환경 내에서 살아가는 나는

이러한 Top의 위치에 올라서고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자기소개를 할 때 당당히 내 꿈은 세계적인 CEO라 말하고

수천만원의 돈을 들어 해외유학을 기꺼이 감수하며

인턴, 연수, 학업으로 인해 눈코뜰새없이 바쁜 학창시절을 보내는 사람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그만한 인재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보아왔고 동경해왔던 영웅들과는 너무 동떨어져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현대는 다른 형태의 영웅들을 요구하고 있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린시절 편향된 독서로 인해 심히 뒤틀려진 내 상식 체계는

아무리 많은 노력이 뒷받침되더라도 남들과 월등히 차이나는

재능이나 의지가 없다면 그건 그냥 인재일 뿐 영웅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남들이 하는대로 외국유학 가서 학위 따온다고 해서

그 이름 세계만방에 휘날릴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닌데,

학점 순대로 주욱 세워놓고 전공훈장 수여하듯

부와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는 것도 결코 아닌데,

그리고 영웅은 그런 '전형적인 방법'으로 탄생되는 것은 진정코 아닐텐데

CEO가 돼야하는데, TOP이 돼야하는데, 평범하게 살긴 싫은데,

내 이름을 길이 남기고 싶은데, 영웅이 되고 싶은데!

라고 부르짖는 그들은 결국 이 난세 아닌 난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배들의 길을 답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주2)

결국 이런 무리한 결론에 이르고만 나는

그럼 대안은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하느냐라는

물음에는 애써 못 들은척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한계. 영웅이 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의

통행제한선인 것이다.



졸업을 앞둔 나는, 주위에 늘 말해왔던대로

유학도 가지 않고 대학원 진학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사회 속에 뛰어들어가기로 했다.

난 영웅이 될만한 인재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영웅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가는

전형적인 길을 가지 않은 채 평범함 속에 노력과 경험이란 기름을 부어

영웅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인재'로 준비되고자 한다.


어릴 때 내가 꿈꾸던

조조나 노부나가, 김우중씨 같은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삶이 흥분될까 하는 생각. 아직 유효하다. 주3)

강력한 카리스마와

평범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용기와 의지와 발상으로 똘똘 뭉친 사람.

아 사람이라면 내 인생 걸고 따라가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을 주는 강한 사람.

그런 영웅.

내년에 어떤 회사로 가든, 아니면 회사가 아니더라도

꼭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내 인생이 송두리채 확 변할지도. 주4)





주1)
스탈린이나 히틀러같은 사람을 영웅이라 보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을 것이나,
이는 개념을 파악하는 시각에 달린 거라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영웅은 평범한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을 말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김일성은 영웅이냐 라는 질문에는 일단은 아니라고 하겠다.
기회를 잘 노린 것 외에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2)
좀 과장된 소리인거 나두 안다. 무턱대고 유학이나 가고보자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결코 뚜렷한 학업정진을 목적으로
가는 이들 더러 하는 소리는 아니다. 내 친구 몇몇을 포함한
그 인재들에게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주3)
얼마나 삶이 흥분될까. 그러나 얼마나 삶이 위험할까.
그래도 왠지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조조와 함께 3배가 넘는 원소군과 싸우러 관도에 나갈 때의 기분,
노부나가와 함께 10배가 넘는 이마가와군을 급습하기 위해
덴가쿠 골짜기로 뛰쳐나갈 때의 기분. 짜릿하지 않겠는가
(절망적일지도-_-)


주4) 내 인생이 송두리채 확 망할지도 모른다.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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