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하양 시외버스터미날.
새끼손톱만한 파리들이 윙윙 날라다니는 후텁지근한 대합실에서
30분을 기다려 경주행 버스를 탔다.
살아보지도 않은 1960년대를 생각나게 하는
대합실 분위기와는 달리 버스는 아주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에어콘은 쉬지 않고 차가운 공기를 쏟아붓고 있었고
생각보다 나의 첫여행은 아주 깔끔히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당일치기 경주여행.
2004년 나의 첫번째 여행이자 내 인생 처음으로 저지르는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뭐. 스무살 이후 서울과 대전에 살면서 6, 7년동안 기차를 100번은 타보았지만
그걸 여행이라 말하기엔 좀 부족한 것 같으니 계산에서 생략하기로 하자.
계획은 1박 2일이었으나
대망의 첫날 경주지역에 뇌전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는 일기예보에
두 손들고 GG를 선언한 관계로 하루를 그냥 날려버리고 말았다.
우습게도 그 날은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루종일 화창하기 이를 때 없었다.
오후쯤되어 인터넷을 통해 아침에 나를 무릎꿇게 했던 경주지역 날씨를 다시 알아보니
'뇌전'은 온데간데 없고 '흐리다 가아끔 비'로 바뀌어져 있었으니
원통하기 이를 때 없었다.
몇년 전 기상청 축구대회 때 소나기와서 난리났다고 하던데, 정말 이 사람들 믿을 바 못된다.
하여간 가까운 경주, 1박 2일이나 당일치기나 별 다를 바는 없을 터
아침날씨가 화창하자 망설일 것 없이 가방을 싸매들고 집을 나섰다.
경주라면 대부분 어릴 때 가본 적이 있을 것이나 불행히 난 그러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세 번 갔으나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는 백제지방으로,
고등학교 때는 동해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가까이 놓인 반찬접시에 손 안 간다는 옛성현의 말씀은 진정 옳은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나이 칠십 노인대학 수학여행 때까지 기회가 없을 듯 했으니
나로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여행지인 셈이다.
그리고 평소의 지론을 다시 한 번 펴자면 에펠탑보기 전에 다보탑 보아야하고
베르사유 궁전가기전에 경복궁 가봐야한다.
해외여행 좋긴 하지만 일단은 자신부터, 우리나라부터 돌아보는게 순리아니겠는가.
신토불이. 우리 것이 마냥 좋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것도 좋은 것임은 분명하다라고 본다.
배일호 선생의 '잊지마라 잊지마 너와나는 한국인~♪'이란 절규가 다시 한 번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시 버스 안으로 카메라를 옮기자.
전 날 숙면을 취하지 못했는지 몸은 피곤하였으나 잠을 잘 수는 없었다.
혼자가는 여행이란 이런 것이었다. 깜빡하다가 차가 포항에 가 있으면 어쩌려구.
몸 조심해야지. 깨어났더니 대마도행 새우잡이 배 지하칸에 꽁꽁 묶인채 실려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원래 세상은 무서운거다. 특히 나처럼 순진하고 연약한 아이에게는 말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을
꺼내 들었다. 짐 모리슨의 Light My Fire에 대한 예찬이 주욱 이어지고 있다.
이 노래. 진짜 느끼하면서도 좋다. COME ON BABY LIGHT MY FIRE~
내 마음에 불을 붙여줘. 뜨겁게. 요즘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버스는 이윽고 경주터미널에 섰다. 아저씨에게 고맙습니다를 외쳐주고
사뿐한 발걸음으로 땅을 딛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푹 꺼지는게 아닌가!
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버렸다...
... 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제법 재밌겠으나 시시하게도 별일은 없었다.
하늘은 조금 흐린 듯했으나 비가 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듯했다.
터미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표를 체크해
휴대폰에 입력시켰다. 여행보다 제 때 무사히 돌아가는게 중요한 거걸랑.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디카로 찍을 걸 그랬다. 역시 경험의 부족이다.
이윽고 여행 시작.
역시 방향치인 나로서는 출발부터 쉽지가 않았다.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받아 펴들었으나 동서남북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시외버스터미날 부근에서만 한 십분 헤매였고
결국 아무 방향이든 가다보면 알겠지 하고 무작정 발걸음을 내딛었다.
뭐.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젠 이런 일이 일어나도 아무렇지도 않다.
난 나를 사랑하거든.
가다보니 대릉원의 표지가 보였다. 찍었는데 제법 제대로 온 셈이었다.
이 때부턴 자신감을 갖고 담대한 마음으로 바쁘게 여행계획을 실천하였다.
날씨가 흐린 덕분에 사진들이 다 우중충하다.
그러나 진실을 호도하지 않기 위해 포토샵은 쓰지 않았다.

대릉원 내부. 무덤큰건 좋았는데. 단지 클 뿐이었다.
누구 무덤인지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없었고.
그냥 한 바퀴 돌아보다가 안에 있는 천마총으로 향했다.

천마총 입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내부가 터무니 없이 작아서
어이가 없었다. 역시 우리나라 관광지에서 스케일을 바라는 것은
무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은 멋있는데 내부는 정말 볼 게 없다.
금관 같은게 전시되어 있기도 했는데 관심없다.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대릉원 내부의 벤치. 요즘들에 벤치에 관심이 많다.
졸업논문으로 공원내 벤치의 산업공학적 배치와 이용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믿거나말거나)

대릉원을 따라 펼쳐져있는 돌담길.
자전거를 타지 않은 관계로 꽤나 많은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경주여행을 자전거로 도전하는 것은 오히려 고생이라고 한다.
특히 몇몇 혈기넘치는 젊은이들이 경주시내에서 불국사까지 감히 자전거로
도전한다고 하는데 이들이 불국사에 도착할 때면 반쯤 폐인이 되어
구토를 일삼다가 횡한 눈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중얼거리며
타고온 자전거에 신나를 부어 불를 지르는 행패를 부린다고 하니(믿거나 말거나)
그냥 도보로 걷다가 버스타는게 현명한가보다.

첨성대에 들리었다. 사진은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그냥 반가웠다. 아줌마 한 분이 나와서 음양의 조화니 뭐니 막 설명하셨는데
별로 귀에 안 들어와서 혼자 몇 바퀴 돌면서 마음에 담고 왔다.

계림으로 향했다. 경주 김씨의 시초인 김알지가 발견(?)된 장소란다.
문씨의 고향도 안 가봤는데 남의 집안부터 챙겨서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암튼 여기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도 별로 없었고
우거진 나무들로 음침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무드였다.

밤되면 제법 무서울 듯도 하다.
계림 뒷쪽으로 난 길을 통해 석빙고를 지나갔으나
이건 정말 에러였다. 작고 볼품이 없어도 한참은 없었다. 사진도 안 찍고 횡하니 지나갔다.
맞은 편에 화살 쏘는 곳이 있어 한 번 가볼까 했는데
왠 초등학생들이 한 이십명 줄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얘네들과 같이 활쏘다가는
'그것도 활이라고 쏘셈? 즐 드셈! ㅋㅋㅋ '
하면서 내 뒷통수를 정조준하여 활을 날릴 것 같아서 미련없이 돌아섰다. 난 애들이 무섭다.

안압지에 갔다. 생각보다 멋있어서 대만족.
시원한게 좋았다. 제법 크기까지 했으니 이모저모로 맘에 드는 곳이었다.
가운데 정자에 갔더니 나이 지긋한 희끗한 머리의 빼빼마른 아저씨와
넉넉한 인상의 마른 아줌마 한 쌍이 조용히 얘길 나누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더듬거리며 대화를 재개했지만 그 와중에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듯 하여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 사람들은 내가 30분 뒤에 안압지를 나갈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삼십년 만에 다시 만난 못다 이룬 첫사랑일까. 안타깝다.
사진 자세히 보면 두 사람 보일지도...

안압지의 커다란 연못은 보기 좋았으니 이런 고무로 깔아버린 길은 좋지 않았다.
관광지 관리를 하긴 하는거냐.
그다음 들린 곳은 경주국립박물관.
박물관 내부는 별로 볼게 없었다. 오히려 기묘한 행색의 일본의 젊은 관광객들이
더 인상에 남았을 뿐. 노란머리로 산발을 한 엠씨몽 닮은 애가 기억난다.

밖에는 그 유명한 에밀레 종이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접했던터라
감동어린 시선으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세월의 바람에 깎여 새겨진 글자들은 이제는 보이지도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엄있어보였다. 이 종 소리가 그렇게 좋다면서?
들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무늬는 고등학교 때 국사책 표지였다.
이걸 여기서 다시 보다니. 기쁘다.


다보탑과 석가탑.
멀리서 보고 '어 얘네들이 여기에 있네' 하고 막 신나서 달려갔는데
짜가였다. 짜가도 꽤나 크게 만들어놓아서 딱 속기 좋았다.
박물관에서 나와 불국사로 향했다.
이노무 버스들이 획획 지나가는 탓에 두대나 놓쳤다.
경주 시내는 목숨을 걸고 도로에 나가서 길을 막아야 버스를 세워주는 모양이다.
이걸로 경주에 대한 이미지 엄청 안 좋아졌다.
운전은 또 어찌나 난폭하게 해대는지.
불국사까지 가는 동안 경적만 거짓말 많이 보태 한 삼백번쯤 울려댄 듯하다. 시끄러웠다.
드디어 도착한 불국사. 불국사 주차장에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 막 헤매다가
겨우 표지판을 발견했다. 나같은 이들을 위해 좀 제대로 표시해달라. 어렵다.

생각보다 작은 정문. 오히려 후문이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전반적으로 불국사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다보탑.
아까 깔끔한 짝퉁을 보다가 다 낡아빠진 걸 보니 답답했다. 왜 이리 많이 상했을꼬.
크기는 10미터가 넘는다고 했으니 아까 짝퉁보다 더 큰듯했다.
솔직히 아까 걔가 더 멋있었다.

석가탑.
얘는 디자인이 단순해서인지 그리 많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림자가 없다는 무영탑이 얘구나. 이젠 안 잊어먹을 듯하다. 직접봤으니까.
근데 그림자는 떡하니 있었다.

불국사 대웅전 뒷쪽에서 나름대로 구도 잡고 찍어보았다.
대웅전 안에 들어앉은 불상은 찍지 않았다. '촬영금지'되어 있으니까.
여행에 있어서 공공질서만큼은 반드시 지키기로 했다.

석굴암가기.
가는 길을 몰라 안내소에 물어봤더니 좀 있다가 셔틀버스 막차가 오니 그걸 기다리랜다.
그 말 듣고 나갔는데 안내소에서 같이 길을 묻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슬림한 검은 원피스를 입은 미씨족 같은 여자분이 태워주겠단다.
그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도 반갑게 맞아주고 해서 이들과 같이 석굴암에 다녀왔다.
참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어디서 왔냐고 그러길래. 얼떨결에 서울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이런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될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어디서 왔냐라는 말을 들으면 대구라고 말하겠지만
제 삼의 지역에 있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되는걸까. 분명 사는 곳은 서울인데 말이다.

이게 석굴암이다. 그런지도 모르고
더 올라가는 길을 막 찾았더랬다. 아무 것도 없길래
설마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떡하니 앉아있는 불상이라.
난 동굴속으로 몇 십미터 들어가야되는지 알았는데 좀 시시했다.
게다가 유리창으로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는데 거기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내부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가운데 앉아있는 불상만큼은 정말 보기 좋았지만 말이다.
뭐랄까. 웅장하기도 했고 표정도 진짜 좋았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며 찍은 청솔모. 다람쥐인지 알았는데 꼬리가 조금 특이했다.
아까 그 부부가 경주역까지 태워주셔서 너무도 수월하게 석굴암까지 여행을 마쳤다.

경주역. 글씨를 이쁘게 적어놓았다.
보문단지와 포석정, 황룡사터 쪽은 가보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리.
그건 노인대학 수학여행때가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또 여행올 일 없겠냐구.
아무튼 이렇게 나의 첫번째 여행은 끝이 났다.
이건 이번 달 말로 예정되어 있는 중국여행과 몇번의 국내여행을 대비한
그야말로 '몸풀기'식 여행에 불과하였으나 앞으로의 여행은 어찌해야겠다는 대충의
감은 잡게 해준 것 같다.
예를 들면 '잔돈은 많이 들고 다닌다', '물은 싸들고 다닌다', '무조건 많이 물어봐라' 등등.
그렇게 큰 감동이 남지는 않았지만 나쁘진 않았다.
나의 '여행혐오증'이란 것도 예상대로, 막상 시작해버리고 나면 별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음의 2004여행 제2편은 한층 규모가 커지지 않을까 싶다.
곧 올리겠음. 음하하.
댓글 9
-
光식
2004.07.27 23:33
어릴때 뛰어놀던 곳이군.. -
나나
2004.07.28 13:36
드디어 댕겨왔구나~ ㅎㅎ
혼자도 다닐만하지? -
문★성
2004.07.29 00:12
光식형 / 예. 형 옛 본거지로 알고 있슴더
나나누나 / 제법 그래요^-^;; -
경
2004.07.29 08:28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라구 했는데...첫출발이 좋아보인다..어짜피 시간은 흐르고....계속 전진...여행기2편을 기대하며.......... -
유주
2004.08.04 02:22
드뎌...멋지게 첫 스타트를 끊었넹~^^*
남은 시간두...멋진 여행하고 돌아오라공~
성의 여행기 기대된당~^^* -
ㅎㅎ
2004.08.06 16:33
ㅎㅎ -
문★성
2004.08.06 21:23
경누님 / 옙. 해보니 재밌네요 히히
유주누님 / 별말씀을 ^-^;;;
ㅎㅎ 씨 / 누구셔요-_-;;; -
jaya
2004.08.18 09:11
경주는 영덕이랑 가까워서 많이 가봤는데 사진으로 이렇게 보게되니 또다른 느낌이 드는군..~와~~~좋오타~~ -
문★성
2004.08.18 23:31
하긴 넌 가까웠겠다. 그래도 최근엔 잘 못 가봤지?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