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여행이란 단어만 생각해도 미지의 장소를 향한 설레임으로
입안 가득 미소가 그려진다고 하고 심지어 여행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고도 하는데
나로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사고의 메커니즘이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게 아니라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아서
핏줄 때문인가 하는 의혹이 잠시 들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아버지는 거의 세계일주를 해본 것 같고 어머니는 외국에 살다오기까지 했다.
그러기에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제주도 한 번 가보지 못했던 것은
선천적이긴 선천적이되 핏줄을 탓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닌 셈이다.
그럼 대체 왜 여행을 싫어하는 것일까.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눈을 감고 차근차근 그려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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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기 며칠전,
벌써부터 분주하다.
이것저것 준비해야할 것도 적지 않으며 알아봐야하는 것도 많다.
여행가는 동안 기존의 생활이 잠시 정지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해서
신경도 제법 써야한다. 또한 돈문제, 시간문제 생각 안 할 수 없겠지.
누군가 돈다발 척 쥐어주면서 한 두어달 니 마음껏 놀다와 하는 식의
여행이라면 모를까.
이윽고 여행지,
동서남북을 좀처럼 감지 못하는 타고난 방향치인 나로서는
여행지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집을 나서는 그 때부터가 이미 고생 시작이다.
미아의 위험이 도처에 산재해있어 신경을 놓아버리면 매우 위험해진다.
겨우겨우 길을 물어 결국 목적지에 이른다.
한적한 곳이라면 좋겠지만 대부분 인기폭발의 명승지일터,
꽉꽉 들어찬 인파 속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10분 관람하려고 두 시간 줄 서있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 와중에서 사진 한장 남기려 바둥바둥 애쓰겠지.
하여간 그렇게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집에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쓰러진다.
그러나 문제들은 첩첩이 쌓여있다.
무턱대로 지른 여행의 뒷일은 여행자 스스로가 감당할 몫.
여행후유증으로 인한 의욕상실은 예정된 바.
당장 내일부터 해야할 일과 텅 비어진 통장 때문에 마음은 무겁기만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눈꺼풀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잠에 곯아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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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여행은 대충 상상만 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짐이다.
여행에는 고생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내 머릿 속에 자리잡힌 명제가
결국 그 고생이 두려워 지금까지의 여행길을 통행제한 해왔던 것이다.
아, 물론 지금까지 말한 것은 '배낭여행'식의 조금은 고달픈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우아하고 품위있고 편하게 다녀오는 귀족식 여행 같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십대의 여행'의 범주에 들지 않아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이십대 초중반의 대학생이라면 좋은 비행기 타고가서 고급호텔에서
와인잔 기울이며 편하게 쉬다가 낮이면 명승지 돌아다니며
그 앞에서 한껏 폼잡은 부이- 포즈로 사진 한 장씩 남기고와서는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며 '빠리의 밤이 그리워'하는 식의 관광은
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식의 '관광'으로 '넓어지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집에서 책 열권 정도 읽으면 인생역전되겠구만. 초샤이어인으로 업그레이드되겠구만.
이십대는 이십대에 맞는 여행이 있다고 생각한다.
편하고 안락한 '관광'은 사십대, 오십대에 해도 충분하다. 벌써부터 그리 편한 것만 찾아서
나중에는 무슨 재미로 살려는 걸까.
그렇기 때문에 난 무슨무슨 호텔이 좋았느니 말하는 애들보다
프랑스 고속도로 옆에서 텐트치고 노숙하다가 태풍 불어와 죽을 뻔 했다는
어느 형(아마 균형이었지)의 여행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한다.
저 정도로 고생하면 정말 많이 남을게다.
평생을 갈 자랑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나에게 저런 고생을 감수할만한 과감함은
안타깝게도 없지만 말이다.
하여간 변명은 여기까지.
지금까지 한 말들은 결국 '내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올 여름에는 몇 차례의 여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저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여행을 도모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속에는 분명 내가 감지못할 엄청난 가치가 숨겨져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7월부터 9월까지. 해외1회, 국내 3회 이상이 목표다.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과연 내 속의 내가 한층 성숙해 있을지는
2004 여행기 결론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