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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2.9 - 괴롭다. 정말 괴롭다.

문★성 2004.05.27 22:30 조회 수 : 312

 

 이것은,

 한 소년이 겪은

 1991년 2월 9일에서부터 2월 12일까지의

 치열한 고뇌와

 죽음같은 번민의 생생한 기록.

 아직도 내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는 이야기다.

 네모칸안에 들어있는 것은 일기의 원본이며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덧붙였다.

 

   1991. 2. 9

 어제 빌려 잃어버린 미니당구게임의 공 때문에  당구게임의 주인인

 도훈이에게 사정을 해보았다. 결국, 도훈이가 봐주어서 내가 공을 잃어버린 값으로

 500원을 주기로 하고 일단 해결됐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니 당구게임을 기억하시는가? 가로는 30cm 정도, 세로는 20cm 정도되는

 조그만 당구다이에 올려진 공을 스프링이 장치된 큐대로 때리며 노는 게임이었다.

 물론 3구, 4구가 아니로 포켓볼 형식이었다.

 잘 기억이 안 나실 분들을 위해 비슷한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올리는 바이다.

 

   1991. 2. 10

 또 큰 일이 일어났다. 우리 집에 놀러왔던  승태가

 아직 안 준 미니당구게임의 채를 부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2000원을 승태와 내가 물어주어야 하는데

 승태가 자기가 5천본드로 붙이겠다며 집에 갖고 갔다.

 걱정이 태산 같다

승태는 초등학교 1, 2학년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친구 중 하나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며

서로의 집에 한 골백번은 놀러다니고 그랬던 것 같다.

대충 이렇게 생겼다.

91년 당시에도 이 얼굴이랑 똑같다고 보면 된다. -_-

그리고 물론, 본문에서 '채'는 큐대를 가리킨다.

5천본드는 5초본드를 잘 못 알아먹은 것 같은데

흰색의 불투명한 용기에 끝이 빼쪽 올라와있는 자그마한 본드를 말한다.

 

   1991. 2. 11

 괴롭다. 정말 괴롭다. 승태는 5천 본드로  채가 붙지 않았다고 하고,

 도훈이는 냉정하게 돈을 요구했다. 우정을 위해서도 도훈이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데 승태의 지금 주머니의 돈은  800원,

 내 돈은 700원 아무래도 부족하다. 또 어디서 누구에게 돈을 빌려 보상해주지....

 정말 괴롭고도 괴롭다. 거기에다 아이들이 말하길

 문제집을  안 배운 것도 다 해야 된다던가?

 하여튼 그 때문에 몇 시간이나 보내버리고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정말이다)

 지금도 골머리가 터지지만 정말 걱정된다.

 괴롭다는 말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왠지 공감이 가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보면서 이리저리 셈을 맞추어 보고는

 낙심하고마는 아이들의 모습이 기억이 날 것도 같다.

 게다가 숙제.

 저 때도 저랬지만 13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직 숙제에 치여 괴로워하고 있다 ㅠ_ㅠ

 여전히 숙제 외에도 해결할 일은 많으니 '머리가 폭발할 것 같' 고

 '골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아이나 어른이나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참 그리고, 도훈이란 친구가 왠지 악역으로 보여지는 듯한데

 못 본지는 꽤 되었지만 운동 잘하고 쌈 잘하고 잘 놀았던

 좋은 친구였다. 물론 많이 친했었다.

 

   1991. 2. 11

 드디어 일이 해결됐다. 내가 엄마한테 2000원을

 얻어 새로 당구게임을 산 것이다.

 그것도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이다.

 게임하나를 잘 못 빌렸기 때문에 내가 돈을

 많이 손해봤다. 다음에는 좀 조심해야겠다.

결국 이렇게 해결된 '미니당구게임 사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 어머니의 교육방침은 '책임있는 자유방임주의'였던 것 같은데

사춘기 지나 철이 들 때부터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경우가 아니라면

학원다녀라 공부해라 숙제해라 무슨 대학가라 군대는 어디가라 어디에 취직해라

와 같은 간섭이나 조언을 일체하지 않으시면서도

내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소재는 분명히 규정함으로써

어릴적부터 신중하게 생각하는 법과 생각있는 자율성을 추구하게끔 끌어주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등학교 들어와서 첫시험에 중학교 때 등수에 약

20을 곱한(덧셈이 아니다-_-) 'XXX등'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왔을 때에도

그저 웃으시면서 앞으로 잘하면 된다라고 말해주신 것이다.

 

지금 이 일기의 경우만해도 아이가 괴로워하고 있다고해서

그냥 팍 쥐어주시는게 아니라 분명하게 빌려주심으로써

결국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게끔 하셨는데

그러니 결론이 '도훈이 쫌생이' '승태 바부' '미니당구 회사 망해버려라'

'이 벼락맞을 세상같으니'가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 손해를 많이 봤다. 조심해야겠다'가 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저 때

 돈을 '빌려' 주셨고 저것 말고도 수십, 수백번

 올바르게 나를  이끌어주신 어머니께,

 진짜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막상 앞에 가면 말 못하겠지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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