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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 정도쯤 되었다.
난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어느 버스정류장에 서있다.
날씨는 스산하고 거리엔 차가운 기운이 맴돌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니 자뭇 회색빛을 띤 것이 조만간 한바탕 퍼부을 것만 같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기운이다.
고개를 돌려 버스가 나타날 도로 저편을 바라본다.
눈쌀을 찌푸리며 시야가 닿는 도로 끝까지 주욱 훑어봐도
버스로 보이는 키 큰 차량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로써 몇 분간 이 자리에
더 서 있어야함은 분명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바라본다. 뭐 특별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흐릿한 하늘만을 쳐다보고 청승맞아지기도 싫다.
입을 조심스레 떼어본다. 기다렸다는듯 알 수 없는 가요 한 구절이 새어나온다.
무슨 노래인지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흥얼거림은 그냥 흥얼거림으로 족하다.

...

응?
노래에 묻혀 떨어져나온 것일까.
초점없이 바라보고 있던 땅바닥에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물이 모여지듯 뭉쳐져
형상화되기 시작한다. 조금씩조금씩 선명해지는 옛기억.. 아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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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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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이었다. 앞쪽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수업시작 종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태지 이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원준의 '모두 잠든 후에'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모두 잠든 후에~ 사랑할거야 아무도 모르게 마음으로~ 모두 잠든 후에~'



여기까지. 갑자기 난 노래를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흥얼거림'의 진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동감할테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특히 후렴부분을 흥얼거리다가 중간에
그만두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해가 안간다면 다음을 따라해보라.
예제는 보편성을 기하기 위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으며
한국가요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으로 하겠다.



'그 어느날 너와 내가 심하게 다툰 그 날 이후로 너와 내!!!'



여기까지. 자. 솔직하게 말해보자. 이어지는 뒷부분을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만약 진실된 마음으로 소리내어 앞의 한 줄을 성심성의껏 불렀고 정확히 '너와 내'에서
마침표를 찍었다면 아마도 당신의 마음 속엔 '친구는 연락도 없고 날 피하는 것 같아~'를
마저 부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를 것이다.
그렇다. 이게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생활 속에 절대적 진리로 자리잡은
이른바 '추상적흥얼거림도중중단싫어미워의 법칙'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마음으로~'를 부르는 순간 이미 내 주위의 상황이 원치않는 방향으로 변해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후 핸들에 배인 땀을 바짓춤에
닦아내며 주변을 살펴보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 내 앞에 놓여져있었다.

교탁 앞으로부터 밀려드는 싸늘한 한기는 선생님이 벌써 교실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를 어렴풋이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를 진작에 걸지 않은 것은
나의 불찰이다. 얼굴을 숙이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던 반친구들이 쥐죽은듯이 조용하다는 사실은 교탁에서 내뿜어지는 오라가
그리 발랄, 상쾌하지는 않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런 매우 부적절하고
부조리한 상황의 주인공은... 설마, 나란 말인가.

난 거북이 머리 내밀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마치 이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과 순진난만의 눈빛 연출도 잊지 않았다.더욱 더
알리바이를 강하게 하기 위해 양볼에 바람이라도 넣어 귀엽게 보여보일까 했지만
너무 과장된 행동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두뇌의 회전은 나를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춰서게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초샤이아인이 된듯 활활 뿜는 열기를 온 몸으로 분출시키고 있는
선생님의 눈빛은 이미 정확히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것이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걸로 보아 교무실에서 교장 선생님께 야단이라도 맞았는지 135차
부부대전에서 석패를 당한 것인지 풍겨내는 분노의 농도는 상당히 진했다.
작달만한 키에 다무진 표정, 미스코리아 출전선수용 롱파마머리를 하고 있던
그 여자선생님은 '독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나는 잘 못 걸린 것이다.

이런 경우 바랄 수 있는 요행이라면 '누가 수업시작했는데 노래부르냐! 조용히 해야지!'
라는 훈계 혹은 한 번 흘겨보고 그냥 수업시작하는 것일테지.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바람이 되어 교실 창문 저편을 통해 운동장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모두 잠든 후에 부른 놈! 나와!'


1차 방어선이 무너졌다. 저렇게 똑바로 얼굴보고 말하니 내가 아닌척 두리번거릴 수도 없다.
그러나 파리가 함락되어도 런던이 남았고 한강대교가 끊어졌어도 낙동강 방어선이 있다.
간단히 손바닥 몇 대 때리고 넘어가거나 복도에서 한 이십분 엎드려뻗쳐 하면 대충
선방하는 것일테지. 교실 뒤켠에 꿇어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설마 머리까지 박겠어?

이런 희망찬 기대로 2차 방어선으로 진군한 문성.
그러나 적의 공격은 또 한 번 예상을 초월했다. 내가 사정거리 내로 접근한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몸을 휙 날리더니 분노의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고 만 것이다.
아차! 선제공격에 당했다. 2차 방어선이고 뭐고 전멸위기군.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번쩍번쩍거리는 찰나 2차 공습, 3차 공습, 4차 공습이 쉬지않고
이어졌다. 이 아주머니 처녀시절 당랑권이라도 배운걸까. 왼손이 뺨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새 오른손이 뺨에 도달해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시
돌아오는 왼손.
난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라'라는 성경말씀을 본의아니게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한대 두대 세던 나의 머리는 어느 순간부터 계산을 포기했으며 나의 정신은 세찬 물살을
따라 혼란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폭격은 겨우 멈추었다.
일제 강점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주위 친구들 서너명이 당시 필수품이던 철제필통을 앞으로 들이밀어줬다.
뺨에 대고 식히라는 것이다. 친구들의 우정에 감격해하면 열을 내리고 있던 내게
짝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해주었다. '스물여섯대다'


물론 많은 것은 아니다. 조용히 있는 성격이 아닌만큼 중고등학교 6년동안 맞을만큼
맞아봤다. 그러나 이때만큼 억울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그 어린 나이에 내린 결론이
'이건 사적인 화풀이다'였으니 말이다.
맞다. 내가 잘못하긴 했다. 그러나 내가 그 나이에 사서오경을 마스터하고
세상이치에 통달했으며 삼강오륜의 가르침을 뼈에 새기고 있었겠는가. 그냥 철없는 녀석
하며 한 번 콩 쥐어박아주면 될 일 아닌가. 그러나 그 선생님의 양손은 가차가 없었다.

요즘 학교에 구타가 없어졌다고 어른들이나 내 나이 또래들은 쯧쯧거리지만
우리가 학창시절 수없이 보아오던 단순한 '화풀이'가 없어진 것만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선생님을 신고하고 폭행하고 욕하는 싸가지 없는 학생들은
정말 죽도록 두들겨 맞아야되지만 모든 선생님이 옳다고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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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때도 아닌데 특선영화로 상영되었던 지난 날의 추억이 슬슬 장엄한 엔딩크레딧을
올림에 따라 나도 현실세계로 슬그머니 발을 옮긴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버스를 타는 것이다.

'야!!!!'

'짝!!!!'

그런데 이 소리는 무엇인가. 동질감까지 느껴지는 이 살과 살의 마찰소리는?
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원점을 바라본다.
그곳엔 두 명의 아줌마가 있었고 방금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필살의 일격을
가한 직후란 것을 금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또 한 방이 허공을 가른다.


'짝!!!!!'

'악!!!!!'

타격음과 비명이 동시에 울린다. 가만히 두면 스물여섯대를 셀 것이 확실하다.
난 몸을 날려 그곳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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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래간만의 장편^-^ 글 중의 '스물여섯'대는 사실 정확하진 않습니다.
     이십대 넘은건 맞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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