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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 키보드

문★성 2004.01.31 22:53 조회 수 : 407

별로 특별하지도 않으면서 남들과 똑같아지고 평범해지는 것을 몸서리치며 거부하는
나의 근거없는 청개구리형 반항심은 '타자'와 같은 아주 사소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다.

1999년 휴학생활 중 공부하기 시작한 세벌식 키보드는 '과학적 자판 배치'로 인한
속도와 정확도의 향상과 손목의 피로 절감이라는 장점의 혜택을 입고자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세벌식 키보드는 컴퓨터 자판을 치는데 있어서 전혀 새로운 구성으로 자판을 재배열한
것이다. 종래의 자판은 보통 두벌식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왼쪽의 자음, 오른쪽의 모음의
두가지 파트로 키보드가 반분되기 때문이다.
(못 미더운 분들은 지금 컴퓨터의 키보드를 살펴보시라)

세벌식 키보드는 이러한 분류를 두개에서 세개로 늘여놓은 것이다.
즉 자음-모음의 양분이 아니라 초성-중성-종성의 삼분체계로 키보드를 나누어놓은 후
보다 많이 쓰이는 음호를 집게 손가락과 같은 활동이 자유로운 쪽에 배정하고
잘 쓰이지 않는 것들을 새끼나 중지에 배분하여 효율을 높이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두 자판의 차이점을 설명해보겠다.
'발바리'라는 단어를 친다고 생각해보자.

두벌식은  ㅂ  바  발  밟    발바  발발   발바리 가 되며
세벌식은  ㅂ  바  발  발ㅂ  발바  발바ㄹ 발바리 가 된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심각한 차이점이 내재되어 있다.
첫째, 발ㅂ 를 칠 때 두벌식은 왼손새끼-오른손중지-왼손검지-왼손새끼 로 치게 되지만
세벌식은 오른손새끼-왼손검지-왼손새끼-오른손새끼로 치게 된다.
한글자를 칠 때 오른손 새끼에서 시작해 왼손 새끼에서 끝이 나는 것이다.
귀찮더라도 위의 순서대로 손가락을 움직여본다면 후자가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세벌식을 사용하게 되면 이벌식처럼 손이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해야하는 지그재그 현상이 크게 감소하게 되며 당연히 속도는 증가한다.
세벌식이 칠 때 두벌식보다 달가닥달가닥 하는 소리가 일정한 음율을 만들며 기분좋게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많이 쓰는 자판을 잘 쓰이는 손가락에 배정하였다. 두벌식도 그런 면은
조금 신경은 썼지만 세벌식과는 현저한 차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위의 순서에도 보이지만 두벌식은 '발발'이라는 글자가 단어를 치는 과정 중에
보여지게 된다. 펜으로 종이에 발바리를 적을 때 '발발'이라는 글자를 적은 후 ㄹ을
지웠다가 발바리로 쓰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런데 컴퓨터를 쓸 때는 그런 비정상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종성이 밀려서 초성이 된다는 것은 한글창제원칙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다. 전공인
산업공학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두벌식은 분명 최적화되지 않을 뿐더러 원칙에도 어긋나
있는 부적절한 시스템인 것이다. 이에 비해 세벌식은 정확한 과정을 통해 해당 글자를
표시해준다. 당연히 오타가 날 확률과 오타 발생시 백스페이스를 눌러야 할 횟수도
줄어들게 되며 깜빡임 현상으로 인한 눈의 피로도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세벌식이 모든 면에서 두벌식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기본'이 이벌식으로 설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벌식을 쓰려면 이 설정을 바꾸어주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으며
(때때로 이 불편함은 세벌식의 모든 장점들을 뒤엎을 정도로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잘 안쓰는 음원들이 새끼손가락 쪽에 몰아졌기 때문에 어려운 외래어는 오히려
두벌식 보다 쳐내기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벌식을 습득하다보면 이벌식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해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벌식으로 '엄마'를 칠 줄 알게
되어버리면 손은 두벌식으로 '엄마'를 치는 법을 까먹고 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사람의 머리만큼 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99년 한 해 동안

두벌식 -> 세벌식습득-두벌식포기 -> 두벌식재습득-세벌식포기 -> 세벌식재습득

의 길고긴 여정을 거친 후 겨우 두 자판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글도 두벌식으로 쓰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결정적으로 하나의 자판을 사용할 때보다
효율은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세벌식으로 쓸 때는 속도가 꽤 나오나 오타가 엄청
늘었으며 두벌식으로 칠 땐 전반적으로 예전보다 속도가 느려졌다.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양용체제를 갖춤으로써 긴 글을 쓸 때는 세벌식으로
짧은 글을 쓸 때는 이벌식으로 마음대로 골라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편해졌으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더이상 타자실력 늘릴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으니
지금이 나에게는 최적화된 상태인 거다.

이것으로 나의 다사다난했던 타자스토리는 끝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무지 쓸데없고 유치한 소리라는 걸. 타자속도가 몇타니 하는 것들 다 초록색
모노모니터가 주를 이루던 XT 시절 유행하던 이야기 아닌가. 요즘 세상에 타자 잘친다고
경력이 추가되는 것도 높게 쳐주는 것도 아닌 것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굳이 삶의 모든 면에서 첨단을 달려야 하며 자신의 인생의 득이 되는 일만  
골라가며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무런 실질적인 이득이 되지 않는다하더라도
남들과 다른 길을 한번쯤 밟아보고 주관적으로 옳다고 생각되어지는 방법을 택해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이 진정 인생을 멋지게, 그리고
재밌게 사는게 아닐까. 세벌식 키보드로의 그야말로 별 소득없어보이는 나의 도전은 그러한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내 자아를 위해 스스로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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