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엽감는 새'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하루키의 소설은 해롭다.
한 번 책을 펴기 시작하면 늪에 빠진 것처럼 정신없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그러다가 책을 덮으면 한동안 정신이 멍해지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등의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
책을 보다 말고 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면 안구에 회색의 흐릿한 꺼풀이 하나
덧씌워진 것처럼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까지 한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다하더라도 기쁨이나 슬픔, 감동과 같이 상투적인
감정들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어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기분들만이 가득 넘칠 뿐이다. 비쩍 말라비틀어진 시커먼 그 무언가가 주먹만한
크기로 뭉쳐져서 무겁게 마음 한 편에 턱하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마도 그 이름 모를 핵(核)은
답답함, 건조함, 모호함, 신비감, 상실감, 허무함
같은 감정들의 화합물일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맛들이 페이지마다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세계명작이라 불리우는 소설들을 제법 찾아 읽어보았지만 이런
느낌을 전해준 것은 하루키의 것이 처음이었고, 또 유일했다.
(..'위대한 개츠비'는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을 주긴 했다만)
기존의 많은 소설들이 전해주는 지루한 전개, 상투적인 묘사, 뻔한 구도,
단순한 인간관계에 실망한 내게 그는 다시금 독서의 기쁨이란걸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내 가슴 속에 박아놓은 핵의 반응이 멈추기 전에
기껏 데워놓은 방바닥 식히지 말고 계속해서 뜨겁게 달구어야 할 것 같다.
일단 질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하루키는 당분간 쉬고
읽다가 짜증나서 관둔 '로마인 이야기'와 구입해둔 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그리고 계속 미뤄온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방학 동안에 섭렵해볼 생각이다.
워낙 쓸데없는 짓 하는게 많아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