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남들이 히네와 우라마시니를 논하며 삼삼오오 당구장으로 향할 때 문★성과 그 패거리들은 태진이냐 금영이냐 논하며 삼삼오오 노래방으로 향하곤 했다. 특히 수능모의고사가 있던 날이나 중간/기말고사의 마지막 날은 암묵적으로 '노래방 day'로 지정되어 있었다.
시험의 짐을 던 홀가분한 기분으로 학교 옆길로 주욱 걸어 내려가 다리 하나를 건너면 '강변노래방'이란 곳이 있었다. 말 그대로 강가가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곳에 위치한 노래방이었다. 그곳은 출입자가 고등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기본 서비스 한 시간은 족히 주었던 가난한 학생들의 안식처요 디딤돌이며 쉴만한 물가였다. 게다가 당시 노래방업계의 양대산맥이었던 금영과 태진 기계를 모두 갖춘데다가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층을 형성하던 아리랑기계까지도 보유할 정도로 넓디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해주던 곳이기도 하였다.
당시 강변 노래방에서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철칙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절대 키(key)를 바꾸지 마라. 김경호 노래를 부르면 그와 똑같은 음을 내야하며 박미경 노래를 부르면 그와 똑같은 음을 내어라. 가성을 내든 악을 지르든 그건 니 맘이다. 못 부른다고 구박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 규칙은 '재미'라는 요소를 위함임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다들 노래 쉽게 불러버리면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다. 가끔은 꺽꺽 소리도 내면서 힘들게 불러야 보는 사람 부르는 사람 다 재밌다)
둘째, 노래는 일절까지만이다. 이절까지 넘어가면 다들 박수치고 환호하면서... 냉정히 ‘정지’ 버튼을 눌러주기로 한다. 계속 그러면 조용히 구석에 쓰러뜨린 후 조직의 응징을 가하여 준다. (요즘에는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여 2절까지 허용하는 모임이 많다)
셋째, 담배는 없다. 담배는 호흡에 장애를 주어 노래를 부르는데, 특히 고음부분을 처리하는데-_- 심각한 지장을 줄 수 있다. (요즘은 다 극복하고 부른다-_-)
넷째, 남 노래 부를 때 절대 큰 목소리로 얘기 나누거나 책자만 뒤적거리지 말기. 이야기는 노래가 끝난 후에. 곡 찾는 것도 좋지만 남 노래 부를 땐 가끔씩 쳐다보면서 따라부른다거나 하는 식으로 관심을 표명하랏.
다섯째, 혼자 부르게 놔두진 말라. 단 당사자보다 크게 부르거나 많이 부르면 죽음이다.
혼자 외로이 부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우정으로서 코러스에 매진하라. 듀엣곡이면 철저히 맞추어주고 어려운 고음부분은 함께 부르면서 같이 망가져주라. 그리고 폼 낼 수 있는 쉬운 부분은 가만 냅둬라. 좋을 때 그 기쁨을 한껏 누리게 하고 어려울 때 같이 힘들어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이다.
여섯째, 예약순서를 지켜라. 처음에 A군-B군-C군-D군 순으로 예약했으면 다음 곡은 A군이다. 단 시간이 오버해서 다들 체력적으로 지치면 순서 무시할 수 있다.
이같은 철저한 규칙으로 인해 우린 노래방 예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으며 더욱더 열심히 노래에 매진할 수 있었다. 2년 동안 거기 마이크에 쏟아부은 눈물과 땀(그리고 침-_-)이 얼마나 되었는지 지금와선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어느 날은 네 명이서 무려 네 시간을 불러제끼기도 했다. '코러스의 법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는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야했으며 나갈 땐 땀에 푹 찌들어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그만하고 나가자는 말을 내뱉지 않았으니 참으로 우린 열정에 타오르고 멈출 줄을 몰랐던 자랑스런 이 땅의 청소년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생활, 그곳에서도 노래방으로의 길은 많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노래방은 그저 '술깨는곳', '새벽에가는 3차,4차'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즉, 노래방을 위한 노래방이 아니라 술자리를 위한 노래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노래방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술자리에 남아 있기도 한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너무도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그리고 pc방이 대두한 후부터는 그 기회마저 대폭 감소해버렸다. 달리 갈 때가 노래방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끌려가야 했던 '노래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인권문제의 대두와 함께 발현된 그러한 풍조로 인해 그 때부터 노래방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버리는 '위화도 회군’스러운 사건의 발생빈도가 매우 높아져버렸다. 지금도 이 현실은 유효하다. 네다섯명이 모두 '노래방에 가잣!'을 외치며 우르르 몰려가는 것은 몇몇 모임들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슬픈 현실. 그렇기 때문에 난 가끔 교복을 입고 노래방 테이블 위에서 공중답보하며 악을 써대던 그 시절 그 때가 그리워지곤 한다.
... 열창 중인 문성-_-

시험의 짐을 던 홀가분한 기분으로 학교 옆길로 주욱 걸어 내려가 다리 하나를 건너면 '강변노래방'이란 곳이 있었다. 말 그대로 강가가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곳에 위치한 노래방이었다. 그곳은 출입자가 고등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기본 서비스 한 시간은 족히 주었던 가난한 학생들의 안식처요 디딤돌이며 쉴만한 물가였다. 게다가 당시 노래방업계의 양대산맥이었던 금영과 태진 기계를 모두 갖춘데다가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층을 형성하던 아리랑기계까지도 보유할 정도로 넓디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해주던 곳이기도 하였다.
당시 강변 노래방에서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철칙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절대 키(key)를 바꾸지 마라. 김경호 노래를 부르면 그와 똑같은 음을 내야하며 박미경 노래를 부르면 그와 똑같은 음을 내어라. 가성을 내든 악을 지르든 그건 니 맘이다. 못 부른다고 구박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 규칙은 '재미'라는 요소를 위함임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다들 노래 쉽게 불러버리면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다. 가끔은 꺽꺽 소리도 내면서 힘들게 불러야 보는 사람 부르는 사람 다 재밌다)
둘째, 노래는 일절까지만이다. 이절까지 넘어가면 다들 박수치고 환호하면서... 냉정히 ‘정지’ 버튼을 눌러주기로 한다. 계속 그러면 조용히 구석에 쓰러뜨린 후 조직의 응징을 가하여 준다. (요즘에는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여 2절까지 허용하는 모임이 많다)
셋째, 담배는 없다. 담배는 호흡에 장애를 주어 노래를 부르는데, 특히 고음부분을 처리하는데-_- 심각한 지장을 줄 수 있다. (요즘은 다 극복하고 부른다-_-)
넷째, 남 노래 부를 때 절대 큰 목소리로 얘기 나누거나 책자만 뒤적거리지 말기. 이야기는 노래가 끝난 후에. 곡 찾는 것도 좋지만 남 노래 부를 땐 가끔씩 쳐다보면서 따라부른다거나 하는 식으로 관심을 표명하랏.
다섯째, 혼자 부르게 놔두진 말라. 단 당사자보다 크게 부르거나 많이 부르면 죽음이다.
혼자 외로이 부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우정으로서 코러스에 매진하라. 듀엣곡이면 철저히 맞추어주고 어려운 고음부분은 함께 부르면서 같이 망가져주라. 그리고 폼 낼 수 있는 쉬운 부분은 가만 냅둬라. 좋을 때 그 기쁨을 한껏 누리게 하고 어려울 때 같이 힘들어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이다.
여섯째, 예약순서를 지켜라. 처음에 A군-B군-C군-D군 순으로 예약했으면 다음 곡은 A군이다. 단 시간이 오버해서 다들 체력적으로 지치면 순서 무시할 수 있다.
이같은 철저한 규칙으로 인해 우린 노래방 예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으며 더욱더 열심히 노래에 매진할 수 있었다. 2년 동안 거기 마이크에 쏟아부은 눈물과 땀(그리고 침-_-)이 얼마나 되었는지 지금와선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어느 날은 네 명이서 무려 네 시간을 불러제끼기도 했다. '코러스의 법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는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야했으며 나갈 땐 땀에 푹 찌들어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그만하고 나가자는 말을 내뱉지 않았으니 참으로 우린 열정에 타오르고 멈출 줄을 몰랐던 자랑스런 이 땅의 청소년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생활, 그곳에서도 노래방으로의 길은 많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노래방은 그저 '술깨는곳', '새벽에가는 3차,4차'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즉, 노래방을 위한 노래방이 아니라 술자리를 위한 노래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노래방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술자리에 남아 있기도 한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너무도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그리고 pc방이 대두한 후부터는 그 기회마저 대폭 감소해버렸다. 달리 갈 때가 노래방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끌려가야 했던 '노래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인권문제의 대두와 함께 발현된 그러한 풍조로 인해 그 때부터 노래방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버리는 '위화도 회군’스러운 사건의 발생빈도가 매우 높아져버렸다. 지금도 이 현실은 유효하다. 네다섯명이 모두 '노래방에 가잣!'을 외치며 우르르 몰려가는 것은 몇몇 모임들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슬픈 현실. 그렇기 때문에 난 가끔 교복을 입고 노래방 테이블 위에서 공중답보하며 악을 써대던 그 시절 그 때가 그리워지곤 한다.
... 열창 중인 문성-_-

웃음소리 들리나?ㅎㅎㅎㅎ~
어쩐쥐~ 넘 소화를 잘 한다 했엄~^^
노래두 좋아하고,영화두 좋아하고,공부도~? 좋아서 했을까? 설마~
노래방에서도 삶의 철학이 담겨있넹~^^
예비혁 아저씨 화이팅~!!^^* 2003-12-30
12:3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