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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히 잠든 밤 몰래 목덜미에 달라붙어 가뜩이나 궁한 피를 몰래 빨아가는 모기처럼
인도산 주삿바늘이 한국에서 아리땁게 가꿔놓은 내 회칠한 무덤 같은 피부를
아무런 의성어나 의태어 없는 고요함 속에 뚫고 들어왔다.
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주사를 잘 놓는 의사라 만분다행한 일이었으나
한 편으로는 프로세스가 지나치게 간결하여 일순 불안했다.
주사기를 어디선가 꺼내온 후 약액을 넣고 그냥 푹 찌른다 - 그게 전부다.
한국에서 주사를 많이 맞아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사를 놓기까지의 과정이
한 서너 개는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는 동작이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했다.
허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낫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아마 그간 내가 인도에서 당한 게 많이 지레 초조함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링거는 총 두 통을 맞았는데 그 와중에도 팔에 주사를 세 방 맞았고
링거에도 주삿바늘로 뭔지 모를 약이 투여되었다. 뭔 약을 그리 많이 놓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진료에 있어 일체 설명은 없었다.
물론 나 역시 알고자 하는 의지와 묻고자 하는 기력 모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금 말하건데, 낫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링거를 놓은 후 아주머니 의사는 느긋하게 아래층으로 사라지고
대신 전형적인 인도식으로 생긴 콧수염 아저씨가 갑작스레 등장하더니 선풍기
상태를 확인하는 등 이것저것을 돌보아 주기 시작했다. 얼굴로 봤을 땐
청소부 같기도 하고 의사 아줌마 찾아 놀러 온 동네 한량 같기도 하다.
마침 그간의 생활로 익힌 인도 남자의 사회적 지위를 구분하는 쉬운 방법이 있어
이를 적용해보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배’를 확인하면 된다.익히 알려졌다시피 인도에는
여전히 브라만 – 크샤트리아 – 바이샤 – 수드라 및 손도 대서는 안 된다는
불가촉천민의 다섯 개(사실 이보다 훨씬 많은)의 사회적 계급, 즉 ‘카스트’가 있는데
지금까지 겪어본 바에 따르면 브라만 등 상위 계층과, 브라만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배가 아주 빵빵하게
나와 있었다. 그냥 한국 사람들 살쪄서 축 쳐지듯 나온게 아니라 정말 탱탱하고
단단하게 부어 올라있어 장난 삼아 콩주머니를 몇 번 던지면 빵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서
‘2011년 가을운동회’, 혹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와 같은 문장이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주르륵 흘러나올 것 같은 그런 배들 말이다.
여기 인도 킴벌리 클라크에서도 지금까지 만난 높은 사람들도 – 사장님, 임원들,
부서장 등등 - 너나 할 것 없이 배가 어마어마했다. 반대로 회사에서 청소하고
식판 닦는 사람들, 혹은 이번 여행에서 만난 많은 하층민들은 하나같이 비쩍 말라 있었다.
가난하고 낮은 계층의 사람치고 뚱뚱한 경우를 못 봤다는 소리다.

생각해보면 우리 나라 같은 경우에는 잘 사는 사람이건 못 사는 사람이건
먹는 음식이 크게 차이 나지 않고 평준화되어 있는 편이다. 연봉 오억 받는 사람도
이천 만원 받는 사람도 똑같이 김치 먹고, 된장찌개 먹고, 삼겹살 먹고
밤에 굽네치킨에서 소녀시대 브로마이드가 동봉된 파닭을 시켜먹지 않는가.
(아주 부자거나 아주 가난한 경우는 예외로 치자)
현재 한국에서의 사회적 격차는 먹는 것이나 그 결과로 나타내지는 살집의 유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동네나 집의 평수, 몰고 다니는 자동차,
들고 다니는 백의 종류 등으로 가늠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후진국인 인도에서는 여전히 이 ‘먹는 것’에 대한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되지 않고 있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각각의 체격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니,
이것 참 알아먹기 쉽다고 좋아해야 할지, 안타까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하간 이런 경험에 의거하여 내 침상 앞을 왔다갔다 하는 아저씨의 배를 살짝 흘겨 봤는데,
아, 분명 허리띠를 하고 있지만 앞모습에서 허리띠가 보이지 않았다.
크게 부어 오르다 못해 아래로 흘러내린 뱃살에 그만 가려진 것이다.
이 사람, 의사다. 틀림없는 의사다. 저건 분명 의사의 뱃살이란 말이다!

내 이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정통파 의사 선생님은 덥지도 않은 날씨에
나름 배려해주는 것인지 겨우겨우 돌아가지 않는 선풍기를 몇 번 가격해
어떻게든 돌게끔 만들어놓더니 내 누운 자리에서 잘 보이는
20인치 짜리 브라운관 티비를 켜고는 내게 물었다. ‘선호하는 채널이 있느냐’
MBC와 온게임넷을 선호한다고 하려다 링거액에 갠지스강물이라도 섞을 것 같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아저씨 인도문화를
외국인에게 전파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서인지 채널을 한 삼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법한 오래된 인도영화가 나오는 곳으로 돌린 후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내용을 보아하니 엘비스 프레슬리 머리를 한 느끼한 인도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를 하는 영화인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도 아름다운
미사여구의 반복이었다. 특히 여주인공을 앞에다 두고 부른 절절한 세레나데가
일품이었는데 감동받은 구절 하나를 여기 옮겨본다.

팙꼻딿헿꽙뚩뤀 빻딹탙 오~~~~
폵품띾닳맑 콹딷헿 오~~~~
퐑팕팕 딿랋맑 뚫뢍뫌뢍 빧따헷
오~~ 오~~~

첨에는 튕기던 상대 여자배우는 남자의 진심에 결국은 넘어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는
북조선 중앙방송의 저녁뉴스 아나운서의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화답했다.

낄라낄라 마낄라 쎄마쎄마 마쎄나
낄라라라 쎄말라라
오~~~ 오~~~
낄랄라랄라 쎄말라랄라
오~~~ 오~~~

마침내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얼싸 안고 수십 명의 백댄서가
뒤에서 국민체조를 추는 와중에 환상의 하모니를 선사하기에 이른다.

팙꼻낄라 딿헿닐라 꽙뚩닐라 뤀빻딹닐라  오~~~~
폵품띾쎄마쎄마 닳맑콹딷쎄마쎄마
퐑팕팕 랄랄라라
딿랋맑 랄랄라라  
오~~ 오~~~

링거를 맞으며 이 노래를 듣고 있자니 한동안 안 아프던 머리까지 아파왔다.
둘이 그냥 혼수문제로 다투다 파경이나 해버리지 하는 못된 생각까지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둘이 또 이별의 노래를 수십 명의 백댄서와 같이 부를 것 같다는 생각에
금방 죄를 뉘우쳤다. 얼른 결혼하고 끝내자, 이 죽일 놈의 사랑 이야기.

그렇게 한 동안을 누워있었는데 아래에서 어떤 아저씨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한테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일방적으로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타타타타 계단을 올라왔다. 얼굴을 돌려 살펴보니 예의 그 호텔 기사 아저씨다.
이 아저씨, 누워 있는 나를 확인하더니 아래층에다 대고 또 뭐라 뭐라 한다.
아니 우리 귀한 손님을 이런 하찮은 침대에 눕혀놓고 저 따위 멜로 영화나
틀어놓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라고 말해줬으면 좋으련만 그럴 리 없지.
그러다가 나한테는 아무 말 안 하고 다시 내려가 버렸는데
그 즉시로 아까의 느긋한 여자 의사 선생님이 조금은 덜 느긋하게 올라와
내 링거액 디스펜서 쪽을 좀 만지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갑자기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지던 링거액이 갑자기 소나기처럼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뚜욱 ---- 뚜욱 ---- 뚜욱 ---- 뚜욱 하고 떨어지던 약액이
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 - 이렇게 떨어지는 걸로 바뀌었다는 거다.
분명 기사 아저씨의 농간이다. 이 아저씨 내게 무슨 한이라도 있는 걸까.
짝사랑하던 호텔 여직원이 내게 반해서 그의 구혼을 거절한 나머지
혼자 오랫동안 매일 밤 와신상담하며 복수라도 다짐해 온 것일까.
물론 저녁 먹을 시간에 밖에서 기다리게 한 것은 미안한 노릇이나
일이 이렇게 늦어진 것도 따지고보면 당신 탓 아니냔 말이다.

이리 생각하는 동안 차라리 내가 빨대로 빨아 먹어도
저 속도는 안 나겠다 싶을 정도의 놀라운 스피드로 링거통은 깡그리 비워졌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는 마지막 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서둘러 주삿바늘을 뽑았다. 링거액을 맞은, 아니 몸으로 들이 마신 나는
간만에 찾아온 포만감에 기분 나빠하며 침상에서 억지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기사 아저씨가 어느덧 계단 옆에 다시 올라와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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