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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일요일부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수요일 오후부터 몸이 안 좋기 시작했다.
그날은 너무 바빠서 점심도 거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한 세 네 시부터 배가 쑤시고
머리가 밥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밥주걱으로 한 두어 대 맞은 것처럼 기분 나쁘게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그런 건지 점심을 안 먹어서 그런 건지
뭐가 뭔지 알 지도 못한 채 반나절을 그렇게 보내다가 겨우 퇴근을 했다.

보통 출퇴근 길에는 기사 아저씨가 모는 차 뒷좌석에 앉아 호젓이 책을 읽거나
아이패드를 가지고 노닥거리기 일쑤인데 이날엔 그럴 힘도 없어
햇빛 가리개용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정도 뒤에 호텔에 도착하니 마치 오매불망 기다린 이산가족 만난 것처럼
졸음이 힘찬 발걸음을 내며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호텔 로비 바닥에 그대로 대자로 누워 자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힘겹게
엘리베이터를 타니 그 안 반신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내 모습이 흡사
불면증에 시달리는 좀비 같았다. ‘잠을 줘 잠을 줘’ 하면서 여관골목을 전전하는
노숙자 스타일의 좀비. 혹은, 좀비 스타일의 노숙자.

방에 들어오자마자 대충 씻고 침대로 땅굴파듯 침투해 들어갔다.
한숨 자면 깨끗하게 낫겠지 하는 깨알 같은 투병 경험에서 나온 나름의 처방이었다.
저녁 7시 좀 넘어 잠든 것 같은데 문득 잠에서 깨니 밤 12시였다. 기대와는 달리 상태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처음엔 그리 아프지 않았던 배가  
꽤나 단단한 복통을 동반하며 슬슬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 때까지도 난
단순히 몸살로 인한 배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무튼 이역만리 인도까지 따라온
고향친구 복통과 함께 밤을 함께 보냈었는데, 이 때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화장실에
체류했던 시간이 침대 위에서 보낸 시간과 거의 엇비슷하거나 좀 더 길었던 것 같다.

여하간 몇 번이고 자고 깨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새벽 5시 언저리에
와 있었다. ‘슬슬 출근 준비할 시간이네?’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다른 한 켠에서
용수철처럼 이런 생각이 튀어 올랐다.

‘하루 쉬어 버리자’

그래, 내가 이 오지에서 굳이 몸의 아픔을 감수해가며 일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장렬히 전사한다고 한들 타지마할 같은 번지르르한 무덤 하나 지어줄 것도
아니잖은가. 열심히 일한다고 돈 한 푼 더 쥐어줄 사람들도 아니고 말이다.

냅다 회사 사람에게 전화를 해 살짝 아파보이는 목소리를 연기하여
‘암 베리 씩 투데이!’를 읊조려주었다. 내가 아프다는데 지들이 어쩔거야.
사무적인 느낌이 반들반들 묻어 있는 걱정 멘트와 신경쓰지 말고 푹 쉬어라 라는
위로 멘트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내가 가로로 눕든 세로로 눕든 수용에 아무 지장이 없는
넓은 침대에 빨래터에서 빨래를 바위에 후려치듯 몸을 철퍼덕 던지었는데
평일에 회사 안 가고 누워 있자니 얼마나 행복한지 감동에 콧등이 시려왔다.
유한킴벌리 입사 후 아프다는 이유로 회사 안 간 건 몇 년 전 ‘볼거리’ 때문에
레테의 강을 헤매던 때 이래로 처음인 것을 이어서 상기하고는 그간 정말 건강하게
잘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잠시 흠흠 거리며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더랬다.

허나 대번에 그 값싼 감상은 바로 허위로 판명 났으니
아까 콧등이 시린 것이 감동 때문이 아니라 몸살 때문이라는 것을
콧등이 끊임없이 계속 시린 관계로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른 증세를 말하자면 배는 계속 당구 큐대로 배꼽 삼 센티 옆을 찍어대는 듯 아팠고
(당구장마다 걸려있던 ‘300이하 맛세이 금지’ 문구 아래의 당구다이 꼴이었다)
머리엔 열이 가득하여 냄비 하나 올리면 바로 보글보글 끓여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더불어 몸은 어찌나 으슬으슬하게 춥고 이까지 시리든지 이게 인도가 아니라
시베리아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손가락끝부터
발가락끝까지 몸 구석구석이 시큰하게 아려왔으니 이거야 말로 몸살이 아니겠는가.
회사사람들한테도 '바디 에이크닝' 정도로 설명해놓은 터였다.

하지만 이 진단은 깨끗하게 오심 판정으로 역사에 기록되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아 깜빡했다. 이거 인도 배낭여행기였지?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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