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네시아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자카르타로 어제 넘어왔는데, 그 여정이 참으로 쉽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보겠다.
1. 말레이시아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그림의 A로 표시된 곳이다. B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C는 싱가폴, 둘 다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고 외국으로 나가려면 이들 중 한곳까지 이동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B로 가서 국제선을 타곤 했었는데 이게 택시로 세 시간 걸리는 거리라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곳 사람들이 C를 한 번 이용해봐라. 두 시간도 채 안 걸린다고 권유를 해주길래 오래간만에 싱가폴도 가볼 겸 해서 도전해 보았는데 전혀 괜찮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교통체증과 각종 검문검색 때문에 세 시간 사십 분이나 걸린 것이다. 체크인 마감되기 삼십 분 전에 겨우 공항에 도착했으니 꽤나 아슬아슬했었다. 그냥 하던대로 할 걸 그랬다.
2. 허나 정작 문제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으니, 체크인 카운터에 가서 전자티켓을 내밀었더니 항공사 직원이 한참을 확인하더니 하는 말 ‘이거 컨펌이 안 되어 취소된 티켓입니다’. 2주 전에 확인메일에다 문서에 싸인까지 해서 보냈는데 여행사측에서 깜빡하고 진행을 안 한 모양이었다. 그래, 내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다. 매월 2~6회씩 국제선 타는데 지금껏 아무 일 없었다는 게 확률상 이상한 거겠지.
3. 조금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티켓 발급해준 인도네시아 직원들과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당장 손에 전화번호가 없어 노트북을 열어 주소록을 확인하려 했는데 왠걸, 배터리가 다 나가서 컴퓨터를 켤 수가 없었다. 전원을 연결해야 할텐데 싱가폴 창이국제공항 내 콘센트는 자물쇠를 일일이 다 채워놓아서 쓸 수 있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냐, 전기 그거 얼마 한다고……
4. 도리가 없어서 담당자는 아니지만 그나마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현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무지 받지를 않았다. 토요일이니 이해는 한다만은 좀 받아주지, 그거 잠깐 받는다고 머리에서 뿔이 나고 엉덩이에서 꼬리가 나냐고…… 할 수 없이 기존 티켓은 무시하고 내 돈으로 구입하기로 했다. 회사에서 갚아 주겠지 라는 믿음으로.
5. 티켓 사러 갔더니 이미 원래 예정된 항공편은 벌써 매진이라 하는 수 없이 두 시간 뒤의 비행기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장구입인지라 가격이 무진장 비쌌다. 싱가폴-인도네시아, 가까운 거리를 원웨이로 가는게 50만원나 하다니!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돈도 손해 봤고 시간도 손해 봤다.
6. 그러고 보니 자카르타 공항에서 날 기다리기로 한 사람들이 있다는게 생각났다. 호텔까지 태워줄 기사 아저씨와 비자발급을 도와줄 에이전시 아저씨. 이 사람들은 그나마 연락처도 알고 있었고, 또 다행히 전화도 재깍 받아주어 예정이 바뀌었음을 얘기해줄 수 있었다. 허나 기사 아저씨와 에이전시 아저씨를 착각해서 기사아저씨에게 비자발급 받는데 이상 없느냐고 헛소리를 해대고 말았으니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다.
7. 겨우 연락 마무리 짓고 체크인 카운터로 가는데,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비행기표를 살 때 받은 영수증이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게 있어야 그나마 비용 청구라도 할텐데. 아까 앉아 있던 자리로 가봐도, 오고 가던 길을 샅샅이 수색해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거 이러다 꼼짝없이 50만원 내 돈으로 물 참이었다.
8. 이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차분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워낙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이에 맞춰 사는 스타일인지라 계획이 어긋나니 평점심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크게 숨을 내쉬고 잠깐 기도를 드리니 곧 정신이 맑아졌다. 백래시가 걸려있던 머리의 타이밍벨트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9. 다시 영수증을 찾으러 갔다. 아까는 안 보이던 것이 이번엔 보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하필이며 핫팬츠를 입고 있던 젊은 여자 두 명 발치였다. 좀 민망하긴 했으나 성큼성큼 걸어가 익스큐즈 미! 하며 허리를 푹 숙여 냅다 집어왔다. 조금 놀라더라, 미안하지만 사정을 설명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10.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에 때마쳐 탑승. 하지만 이건 또 어인 일인지 좀처럼 이륙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기장 아저씨는 연거푸 방송을 통해 차례가 많이 밀렸다고 알려주었고, 그렇게 활주로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한숨 잤는데 제법 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주로였다.
11. 비행기가 마침내 떴다. 무진장 늦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괜히 시간 확인하면 마음이 조급해질까 봐 애써 무시했다. 허나 비행기에서도 이상한 일은 그치지 않았다. 저녁시간 스튜어디스들이 식사를 나눠주는데 늘 그렇듯 알아서 주겠지 하고 한참 책에 머리를 박고 읽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나 내 주위 앞뒤 전후 모두 식사를 끝내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앞쪽에선 식기 회수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이거 또 뭔 일이냐. 스튜어디스를 불러서 나 아직 밥 못 먹었다. 그랬더니 나보다 자기가 더 황당해하더라. 싱가폴 항공 그러면 서비스로 정평 난 항공사 아니던가. 다들 오늘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대체!
12.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여섯 시 도착 예정이었는데 일곱 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티켓 문제가 없었으면 네 시에 도착 예정이었다. 더군다나 수화물로 부친 짐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짐 찾고 공항 나오니 여덟 시 이십 분이었다. 에이전시와 기사아저씨 모두 잘 만나긴 했지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열 번은 넘게 했다. 어떻게 보면 나도 피해자이긴 하지만 나 때문에 손해 본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이 사람들 나 때문에 토요일 저녁을 날려버린 셈 아닌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망측한 기분이었다.
13. 그 다음부터는 다행히 일이 잘 풀려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는데, 여하튼 정말 이상할 정도로 일이 안 풀리는 하루였다. 뭐 일이라 언제든지 꼬일 수 있으니 별로 신경은 안 쓰이는데, 것보다도 여전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 사고 회로가 여유있고 유연하게 가동하지 않는 자신이 못내 불만족스러웠다. 아직 멀었다. 이래 가지고서 무슨 좋은 리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된 단 말인가.
14. 이런 상황에서 차분하게 대처할 만한 여유를 가지려면 아마도 다양하고도 이상한 경험들을 더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겪으면 겪을수록 사람은 더 강해질테니까. 달갑진 않지만 더 나이 먹기 전에 더 많이 부딪쳐보고 더 많이 당해봐야 하겠다. 그런 과정 없이 '큰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 하여 이번 일 또한 마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조금 더 컸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제 말레이에서 아예 인도네시아로 넘어간건가?
아님 저번 벳남처럼 잠깐 ??
ㅎㅎㅎ
저는 4학년 여름방학을 필리핀에서 보내볼까 합니다ㅎㅎㅎ
왜 자꾸 동남아냐고 주변에서 그러더라 클클클
연락한번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