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알라룸푸르의 택시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외국에서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지라
틈을 내서 가볍게 말하면 ‘나들이’, 좀 무게를 싣자면 ‘여행’, 대충 얼버무리자면
‘관광’을 다니곤 하는데, 외국인 나들이객, 여행객, 혹은 관광객으로서의 나는
사실 아래와 같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1. 타고난 방향치다. GPS 센서가 태어날 때부터 아예 탑재되지 않았다.
2. 수줍은 성격이라 누구 붙잡고 길 묻는 게 어렵다
3. 거기다가 외국이다 보니 말이 안 통한다. …아, 기실 한국에서도 말이 잘 안 통하곤 한다
4. 항상 혼자 다닌다. 단체로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5. 무작정 걷고 보는 스타일이다. 대중교통보다 두 다리를 더 의지한다
이와 같은 결점이 종종 낳곤 하는 심각한 문제를 한 단어로 표하자면 ‘미아됨’,
길을 잃어버린다는 거다. 방향 감각도 없는 녀석이, 길을 물어보지도 않은 체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혼자 대책 없이 감에 의거하여 걷다 보니
목적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곳까지 흘러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은 몸대로 지치고, 계획했던 스케줄은 날개 없이 추락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답답한 상황,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 때 그나마 구원이 되는 것이 택시의 이용되겠다.
하지만 외국에서의 택시를 타는 것은 영 마뜩치 않은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별로 추억하고 싶잖은 에피소드들도 있으니 말이다.
1.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심야 택시 잡고 호텔 가는데 27만원 나왔던 일.
내가 길을 잘못 얘기해서 그랬다. (다행히 회사에서 경비로 다 처리해주었다)
2. 베트남에서 미터기 조작한 사기 택시를 타서 정가보다 세 배 이상 지불했던 일
3. 그래서 다음에는 좀 조심해서 택시 골라 타려고 하다가 출국장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던 일. 집에 겨우 갔다.
4. 태국에서 좀 편하자고 일부러 비싼 택시 타고 갔더니 내릴 때 기사 아저씨의
‘유 슈드 깁 미어 팁!’ 소리에 기분 잡쳤던 일
5. 태국에서 현찰을 잘못 건네주고는 택시 떠난 후 알아챈 일 (2만원 내야 되는데 4만원 냄)
기타 승차거부. 기사 아저씨 짜증, 기사 아저씨와 더불어 길 잃어버렸던 일 등등…
외국 택시와는 영 상성이 좋지 않은 나를 알기에 이번에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도 꽤나 조심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쿠알라룸푸르의 택시는 외국인들이 타면 미터기를 켜지 않고
요금을 뻥튀기한다던가, 타자마자 일단 정가의 두 세 배로 협상부터 하고
운전 시작하는 것으로 나름 유명하니 가능하면 택시에는 눈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어코 택시를 타야 하는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
앞에서 말한 ‘미아’가 되었을 때였다. 위의 사진의 파란색 택시는 우리나라의 모범택시와
비슷하여 사기를 치거나 돈 가지고 입씨름을 하진 않는다고 들었기에 이용해봤는데
비싸긴 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결국 한 번은 하는 수 없이 일반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나 우려했던 일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처음에 미터기를 켜길래 다행이다, 제대로 잡았구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잘못 잡았다.
내가 가자고 한 곳이 조그만 건물도 아니고 영등포 타임스퀘어 만한 대형 백화점이었는데,
그게 눈 앞에 훤히 보이는 대로에서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좌회전을 하더니
후미진 골목길을 돌기 시작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직진 금지 같은 교통 문제로
못 가는구나 싶어서 가만 있었는데 한참 보다 보니 이 아저씨 운전하는 폼이
그냥 골목길 천천히 답사하는 모양새다.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이 생각났다.
지금 양 몰이 하시는 겁니까.
참다 못해 당신 지금 뭐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못 알아듣는 시늉.
……알아들었잖아! 방금 움찔했잖아! 눈썹이 파르르 떨렸잖아!
그러다 마침 엄지 손가락만큼 작아진 백화점 건물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길래
저기 있지 않느냐! 저기로 가야지! 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아아, 오케이 오케이 하며
어색한 연기력으로 탄식을 내뱉더니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더라고.
그러더니 처음에 좌회전 했던 큰 길로 다시 돌아오더니 이번엔 직진해서 가는 거였다.
길을 알고 있었던 거다. 하긴 저렇게 큰 건물을 모른다는게 이상한거지.
기분이 상해서 어느 정도 걸어서 갈만한 거리가 되자 확 내려버렸는데
돈은 또 다 받더라. 한 몇 천원 더 낸 거라 큰 돈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불쾌했다.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겠지만, 이 일로 인해 그간 말레이시아에 가지고 있던
좋은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져 버렸거든. 대중교통 문화가 이래서야 어찌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외국인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정부라든가 경찰에서
든든히 지원을 해주어야 더 많은 외국인들이 편한 마음으로 찾아올 거고,
관광수입이든 투자든지 간에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건데,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선진국으로써 발돋움할 수 있을 터인데, 뻔히 미터기 조작하는 불법택시인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베트남 정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안 거지만 베트남 불법 택시는
겉모습만으로도 분간이 된다. 이거 그냥 내버려두는 거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이런 농간을 놔두는 말레이시아 정부는 분명 문제가 있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인천공항에서 사기를 치고 다니는 택시 기사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지갑을 열어보라고 하더니 달러 지폐를 한 움큼 뽑아가기도 했다더만.
이런 걸 보면 한국도 멀었다. 말이 안 통하는 초행길의 외국인들, 즉 ‘약자’를 상대로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먹는 불법이 존재하는 한, 그게 심심찮게 기사화 될 만큼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한 우리나라도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동남아 후진국들과
차이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택시는, 적어도 외국인들에게는 한 나라의 얼굴이고 명함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나라에게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은 주어질리 만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