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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단상] 자전거 도둑 맞다

문★성 2009.05.05 13:57 조회 수 : 86

동네 엔젤리너스 앞 가로수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매장 안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된장남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한 시간쯤 되었나?
갑자기 낯익은 자전거가 내 눈 앞을 확 지나가는 거였다.
의심할 것도 없이 내 자전거 '샴푸'였다. 매니아들의 전유물과 같은 자전거인지라 내 것과 똑같은 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흔할리 없었다.

얼른 뛰쳐나가 보니, 하얀 모자를 쓴 쪼그만 녀석 하나가
내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발을 굴러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자전거는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로수로 가봤다. 내 자전거가 놓여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잠금장치를 푼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놈을 찾으려 사라진 방향으로 냅다 뛰어갔다. 잡아야 할 노릇이었다. 대체 얼마짜리 자전거인데 저런 꼬마한테 절도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걸 쉽게 찾을 리 만무했다. 골목골목을 뒤지고 다녔지만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 이거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도와주세요.' 순간 뒷쪽에서 땡땡 하는 자전거 벨소리가 들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조그만 골목길 안에 초등학교 4, 5학년 쯤 되는 애들 대여섯명이 우루루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 내 자전거와 그걸 훔쳐간 하얀 모자를 쓴 녀석이 있었다.

난 순간이동하듯 그 앞으로 가 하얀 모자의 머리를 팍 후려쳤다.

"야. 너 미쳤냐? 세상에 대낮에 자전거를 훔쳐가? 임마. 이게 십만 원 이십 만원 하는 자전거가 아냐. 너 지금 뭔 짓 한 건 줄 알어?"

애들은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아까의 나 못지않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훔쳐간 녀석은 '어떤 중학생 형들이 가져가도 된다고 해서 가져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 내게 더 혼이 났고, 부모님 연락처가 어떻게 되냐는 얘기에 '정말 죄송하다. 잘못했다'의 비굴모드로 매달렸다. 옆에 있는 친구들은 녀석보고 '야. 얼른 무릎 꿇어' 이러고 있었다. 대낮에, 사람들이 마구 지나가는 길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유유히 훔치는 것으로 보아 이 녀석들 전과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순간 성경에 나오는 비유하나가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6천만 데나리온이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진 후 갚지 못해 온 가족이 노예가 될 상황에 처했는데, 왕이 이 사람을 가엾게 여겨 깨끗하게 탕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기쁨을 누리기는 커녕 집에 오다가 만난, 자기에게 100 데라니온 빚진 후 아직 갚지 못하고 있는 친구를 보자마자 크게 꾸짖고는 감옥에 넣어버렸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를 잡아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며 빚탕감을 취소하고 그를 잡아가두고 말았다.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처럼 그 용서를 세상에 실천하며 살아가라는 이야기이다.

나 역시 이 녀석을 경찰에 데려가고 부모를 불러오고, 끝까지 합의를 안 해줘 구치소에 쳐넣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내 모습은 저 비유에 나오는 악한 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말씀대로 살아야된다고 만날 다짐만 하고는 실천을 못한다면 그게 무슨 기독교인이겠는가. 얘들이 내 자전거를 파손시키거나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돌려받았으니 나로서도 크게 피해본 것도 없지 않은가.

해서, 몇 번 말로 좀 혼을 낸 후 그냥 용서해주기로 했다. 기분이 영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자전거를 끌고 뒤돌아 나오는 내 등 뒤에서 애들은 '고맙습니다'를 여러 번 외쳐댔다. 저 녀석들은 또 누군가의 자전거를 훔칠지도 모른다. 그 때의 피해자를 생각한다면 지금 나의 소행은 잘못된 것일테다. 하지만 적은 확률이나마 저 녀석들이 '이제 그만하자, 큰 일 나겠다'라는 합의와 함께 손을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조금은 순진한 기대를 해본다.

태양이 진짜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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